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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30 19:10 수정 : 2005.06.30 19:10

바야흐로 하버드대학(할 일 없이 왔다갔다 하는 곳)에 다니고 있다고 자조하면서도 현역 못지 않은 필력을 자랑하는, 나와 함께 정년을 맞은 중국 근대문학 전공의 K형이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왔소. 여전히 우렁찬 목소리. 국내외 정세는 물론 백발이 흑발로 감쪽같이 변하는 초속 건강비결에 이르기까지 무소부지, 종횡무진으로 늘어놓더니, 갑자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변하지 않겠는가. 사연인즉 이러했소. 한·중 근대문학 세미나가 난징(南京)에서 열리는바, 기조연설을 맡았다는 것. 그게 어째서 이 활달한 사내를 기죽게 했을까. 평생을 해온 것인 만큼 평소의 실력대로 하면 될 테니까. 그야 그렇지만 기조연설 제목이 지정되어 있다는 것.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 기조연설이 <한국 근대문학에 나타난 중국인상>이라는 것. 그러니까 중국측 기조연설도 <중국 근대문학에 나타난 한국인상>이라는 것.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야 그렇지만 자료를 검토해보니 도무지 내용이 빈약해서 난처하다는 것. 그러니까 자료를 좀더 모아보아야 되겠는데, 네놈이 그 방면 전공이니까 협조하라는 것. 풀이 죽어 애원하는가 했더니 어느새 또 그 우렁찬 목소리가 돌연 협박조로 변해 있지 않겠는가. 귀국할 땐 네놈이 구경도 못한 기막힌 술을 한 병 가져다주겠다는 것.

‘감자’의 왕서방 ‘홍염’의 악질 지주…
한국문학속엔 추악한 중국인만
중국 문학엔 인간적인 조선인 깊은 통찰 대조

한참 쓰고 있던 원고를 밀쳐놓고 며칠을 두고 이 과제에 매달렸소. 그 기막힌 술 때문도, 애원이나 협박 때문도 아님은 새삼 말해 무엇하랴. 내가 전공해온 한국 근대문학의 성스러움이랄까 권위랄까 좌우간 그런 것이 나를 짓눌렀다고나 할까. ‘인간은 벌레가 아니다’로 정리되는, 인간의 위엄에 어울리는 문학 그것이 내가 해온 근대문학인 만큼 그 속엔 응당 중국인의 인간다움의 형상화가 오롯이 스며 있을 터. 그런데,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그런 작품이 쉬 발견되지 않았소. 다소의 차이가 있다 해도 한국 근대문학에 나타난 중국인상은 한결같이 부정적이었소. 중국인 지주를 도끼로 쳐죽이며 집에 불을 지르는 <홍염>(최서해, 1927), 만보산 사건에 관련된 <새벽>(안수길, 1935), 조선 처녀 복녀를 죽인 감자밭 주인 왕서방이 등장하는 <감자>(김동인, 1925) 등에서 보듯 중국인이란 저질이자 악질이며 또한 추악한 인간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겠는가. 이런 부정적 이미지를 물리치기엔 조선인에게 더운물을 한 잔씩 나눠주는, 무표정하지만 인간적인 중국인을 다룬 <물 한 모금>(황순원, 1943)으로는 역부족일 터. 그제야 K형의 난처함이 확연히 깨쳐졌소. 아무리 호방한 K형이지만 기품 있는 중국인 앞에서 이런 사실을 밝히기엔 힘겨웠으리라 추측되었소.

한편 중국측은 어떠했을까. 바진(巴金)을 비롯, 궈모뤄(郭沫若) 등 대가급 작가들이 조선인을 작품에서 퍽 호의적으로 다루었음은 알려진 일. 특히 <목양애화(牧羊哀話)>(1918)를 비롯 재일조선인 노동자를 다룬, 망명지 일본에서 쓴 궈모뤄의 소설 <되돌아온 닭>(1933~37)은 그가 얼마나 조선인의 인간스러움을 깊이 통찰했는가를 웅변하고 있소. 필시 이번 세미나의 중국인 주제 연설자는 이 작품을 언급할지도 모를 일. 이에 어떻게 우리의 K형이 맞설 수 있을까. K형의 난처함이 눈에 잡힐 듯했소. K형이 전화를 또 걸어오면 이렇게 충고를 할 참이었소. 정면돌파가 그것. 사실 자체만큼 감동적인 것은 많지 않은 법이니까. 필시 이 사실을 K형도 알아차렸는지, 날짜가 임박했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지 않겠소.

문제는 다음 단계. 어째서 한국 근대문학은 부정적으로만 중국인을 다루었을까를 학문적으로 규명하기가 그것. 응당 여기엔 한국 근대문학이 지닌 파행성이랄까 모종의 한계성이 새로운 비판적 과제로 불거질 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K형이 장담한 그 기막힌 중국술의 맛도 향기도 다 달아났소. 이것이 초초히 귀국한 K형을 만나면 내가 쓴 소주 한잔을 대접코자 하는 이유이오.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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