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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30 19:31 수정 : 2005.06.30 19:31

1.

박주영이 나타났다. 신난다. 중요한 경기, 결정적 고비마다 골을 참 잘도 넣어줘서도 신나지만 그가 제대로 신인류여서, 참으로 신난다. 천재라 불린 선배들에 비해 그의 테크닉과 피지컬이 월등한 건 결코 아니다. 20세기 아시아를 대표하는 차범근. 그 허벅지. 스포츠머리. 불굴의 의지. 그 차범근에게서 난 박정희 시대의 근육을 읽는다. 당대의 선수는 그렇게 시대 우성형질의 결정이기 마련이다. 차범근에 비견되는 박주영은 그러나, 테크닉과 피지컬에서 차범근을 능가하지도, ‘차범근적’이지도 않다.

혹자는 그를 보고 이천수의 대담함을 말한다. 같은 고대 출신으로 십대에 국대 선발 A매치 데뷔 연속 두 경기 골 기록했으며 FIFA(국제축구연맹)가 일찍부터 주목한 점까지 닮은꼴인 4년 선배. 프리킥 상황이 나면 볼을 주워 들고 선배들을 제치고 자신이 차겠다고 나서고 베컴과 지단이 라이벌이라며 우리나라 선수 중 본받을만한 선배가 없다던 ‘고종수적’ 앙팡테리블의 완성형. 기존 질서와 위계가 하나도 당연하지 않은, IMF(국제통화기금)와 인터넷으로 도래한 권위해체시대의 당돌한 안티테제.

그러나 박주영은 ‘이천수적’이지도 않다. 그는 배우고 싶은 선수는 많지만 닮고 싶은 선수는 없다 말한다. 스위스전을 지고는 좌절하는 대신 이제 이기는 법을 알았다 말한다. 브라질 전을 묻자, 브라질도 강팀이지만 우리도 강팀이라고 말한다. 비장한 사생결단도 없고 기선제압용 호언장담도 없다. 누군가를 이기려는 게 아니라 담담하게 자기 게임을 하려 한다. 그는 이전의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다. 우린 이런 유형의 선수를 지금까지 가져본 적이 없다. 그는, 스스로 테제다.

2.

박성화, 청대에서 퇴장해야 한다. 브라질에 패했기 때문은 아니다. 사실 그는 한국 감독으론 드물게 정립된 수비이론을 가진 학구적 감독이다. 그의 축구에 뻥축구, 잠그기 축구라는 비난도 있지만 그건 승리를 위한 그 나름의 공식이다. 미들에서 실수는 위험으로 직결되니 전방 공간으로 질러줘야 한다는 그의 전술을 뻥축구라 부를 것인지 효율적이라 할 것인지, 골을 선제했으면 승리를 위해 잠그기에 들어가는 걸 치사하다 할 것인지 신중하다 할 것인지는 사실 가치판단의 영역이 아니다. 그가 리스크를 헷지하고 도전에 응전하는 방식, 그의 세계관이 그럴 뿐이다. 좋아하거나 싫어할 순 있어도, 그 자체로 옳거나 그르지는 않다.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방식으로 이기고 브라질은 브라질 방식으로 승리하는 거다.

“우승 못해 분하다”하지 않고
‘세계의 벽’ 운운하며
주눅들어 자기방어나 하는 것
이젠 정말 지겹다
하지만 ‘박주영 세대’는 다르다
그들은 좌절하는 대신
“이기는 법을 배웠노라”고 말한다

%%990002%% 그의 퇴장 사유는 그 전술 혹은 패배 자체에 있지 않다. 브라질도 패한다. 문제는 그 패배의 전후를 다루는 멘털리티. 그는 선수 개인의 기량차를 극복하지 못했다 말한다. 그리고는 세계의 벽을 말한다. 또 나왔다, 세계의 벽. 난 이제 경기 전 상대 강점을 나열하고 우리 약점을 자백하며 알리바이를 챙기고, 패배 후엔 세계의 벽을 언급하는 감독들이 지겹다. 내셔널리즘에 포박된 성적지상주의의 대한민국에서 반세기 동안 세계무대에서의 패배를 습관화한 개인들이, 그렇게 매맞는 아내처럼 낮아진 자존감으로 자신의 열세를 질서처럼 내면화한 변방인들이 지레 주눅들어 자기방어부터 하는 거, 이해는 한다. 하지만, 패배의 앞뒤를 그렇게 순응하며 아귀맞추는 이 멘털리티. 정말 지겹다.

3.

2002년 독일전에 패하자 언론들은 이 정도면 잘했단 거국적 자위에 즉각 착수했다. 분했다. 패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패배를 원만하고 익숙하게 처리하는 우리 숙달됨이. 평생 다시 오기 힘들지 모를 결승기회 놓친 걸 하루 이틀은 충분히 분해해도 좋으련만. 습관성 탈구처럼 패배를 다루는 그 수습 동작에 20세기 우리네 굴곡의 역사가 알통처럼 배겨 있는 거 같아 속상했다. 뗑깡부리는 이탈리아가 차라리 부러웠다.

모든 나쁜 점의 가장 나쁜 점은 그게 유전된다는 거다. 상대가 강하다 말하는 게 공포가 아니라 냉정한 상황인식이려면 자기긍정부터 전제되어야 한다. 박주영 세대는 그게 된다. 세계의 벽에 막상 부딪혀 보니 오히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들을 위해, 나는 이제 우승 못해 분하다 말하는 감독을 원한다. 우리가 세계의 벽이라 말하는 감독을 원한다. 호기가 곧 승리는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이미 이긴 경기만 이기는 법이다.

세레모니는 쫌 맘에 안 든다. 어쨌든. 씨바.

박주영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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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에 발행하는 섹션 ‘18.0°’에는 에세이와 담론, 책과 문학 이야기를 타블로이드판 32면에 모았습니다. 18.0°는 두뇌활동이 가장 활발한 대기 온도입니다.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김윤식(문학평론가)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 이재현(문화평론가) 김찬호(한양대 강의교수) 김어준(<딴지일보> 총수) 홍은택(전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 최보은(전문 인터뷰어)씨 등 우리 시대 논객들이 한국 사회와 인물들을 탐구합니다. ‘한겨레 그림판’ 초대 화백으로 한국 시사만화사에 한 획을 그은 박재동 화백의 그림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는 없고, 다른 신문에도 없는, 지식과 사색의 향연으로 독자들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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