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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30 19:35 수정 : 2005.06.30 19:35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 발행인

쌀 개방 협상 비준을 반대하여 시위에 나선 농민들이 전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인 ‘파업’을 단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파업은, 예컨대, 이미 모내기가 끝난 논의 모를 트랙터로 밀어버리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농민들이 자기 손으로 가꾼 작물을 뒤엎거나 불태워버리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지만, 여러 해 동안 사람들이 이런 장면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이것은 이제 주목할 만한 사건도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내가 이런 장면에 처음 접한 것은 지금부터 15년 전이다. 그 해 봄 보리타작을 앞둔 농민들이 수확해봤자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되었다고 아예 보리밭을 불태워버리는 일이 전국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그 사건은 내가 <녹색평론>의 발행을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나는 지금도 그 때 내가 받은 엄청난 충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전에도 나는 막연하게나마 우리의 농촌이 쇠퇴일로에 있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농민들에게 자기들의 피땀으로 기른 작물을 불태워버리도록 강요하는 ‘근대화된’ 한국경제의 메커니즘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나라가 사회적 약자와 자연의 끝없는 희생 위에 추구해온 경제개발의 유일 합법적인 명분은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가난의 이미지는 바로 보릿고개였다. 그런데 이제 다 자란 보리밭을 통째로 불태우는 게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행위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제논리였지만, 그보다 더 기막힌 것은 이런 근원적인 불경(不敬)에 기초한 경제가 성공적인 발전의 모델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상황은 15년 전에 비해 더욱 참담한 것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극단적으로 도시화된 데다가, 비록 오염투성이지만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오늘의 한국사회에서는 농촌이나 농민의 현실에 대한 사회적 관심 자체가 희미해져버렸다. 곳곳에서 농민들이 논밭을 뒤엎고, 농기구를 불태우고,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도, 일부 매체를 제외하고, 이른바 유력 일간지들은 이에 관한 쥐꼬리만한 기사도 게재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제 ‘성공적인’ 산업국가의 하나로서, 한국의 경제는 농촌과 농민의 운명에 연연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하기는, 이 나라의 권력엘리트들 사이에서 농사문제는 더 많은 무역과 더 높은 성장을 방해하는 걸림돌이라는 인식이 광범하게 유포되어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경쟁력 제고를 위해 대농 육성하는 한국

산업적 영농 키운 미국 흙 유실되고 사막화 진행 산업 논리는 토지를 약탈
소농의 퇴출은 인간생존 토대인 흙을 보호할 사람들과 그 공동체를 없애는 짓이다

그러나,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농사는 이대로 포기하고, 식량은 수입해서 사다먹으면 된다는 논리가 과연 이치에 맞는 것일까. 가령, 식량수입에 필요한 돈을 벌어다 줄 지금과 같은 성장과 무역체제가 정말로 지속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설령 돈이 있다한들 늘 해외에 식량이 준비되어 있을지 결코 장담 못한다. 이것은 기초적인 사실이다. 그런데도 식량자급률 25%라는 위태로운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비교우위의 논리를 내세워 농사를 천대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사고능력을 상실한 정신상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고불능의 상태는 ‘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지배논리에서 한걸음도 벗어날 궁리를 하지 않는 정책결정자들에게는 고질이 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나라의 농정이 드러내는 사고의 불능 상태는 아마 유례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농산물 시장개방에 대한 대응책은 늘 영농의 대규모화를 통한 경쟁력 제고에 초점이 맞추어져왔고, 그 결과 대농, 즉 기업농의 육성과 소농의 퇴출이 농정의 일관된 목표가 되어왔다. 지금 국회에 상정되어 있는 농지법 개정안이라는 것도 그 골자는 자본을 가진 도시인들의 농지소유를 합법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소농의 소멸을 앞당기자는 것이다.

과연 이런 방식으로 한국농업이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지도 매우 의심스럽지만, 그보다도 이런 정책의 필연적인 결과가 나는 너무도 두렵다. 이런 식이라면 조만간 이 나라에서 농촌공동체와 농민이 사라져버릴 것임은 명확하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농민은 소농이며, 소농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가 마을이다. 그러한 농민과 마을이 소멸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그것은 인간생존의 토대 중의 토대, 즉 흙을 보살피고,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과 그들을 기르는 공동체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를 들어, 기계와 화학물질 의존을 불가피하게 하는 산업적 영농의 결과로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에서 흙(表土) 전체의 4분의 1이 유실되었고, 그 결과 빠르게 토지의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업의 논리는 토지에 대한 약탈을 불가피하게 한다. 흙은 원래 몹시 까다롭고, 취약한 성질을 갖고 있다. 흙의 이러한 본성을 잘 이해하고, 정성스럽게 보살필 수 있는 능력은 오래된 농촌공동체에 뿌리박은 자율적인 농민에게만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포식(飽食)의 시대일수록 우리는 ‘흙의 문화’야말로 사람다움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humanus)은 흙(humus)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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