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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녹색평론 편집/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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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적 영농 키운 미국 흙 유실되고 사막화 진행 산업 논리는 토지를 약탈
소농의 퇴출은 인간생존 토대인 흙을 보호할 사람들과 그 공동체를 없애는 짓이다 그러나,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농사는 이대로 포기하고, 식량은 수입해서 사다먹으면 된다는 논리가 과연 이치에 맞는 것일까. 가령, 식량수입에 필요한 돈을 벌어다 줄 지금과 같은 성장과 무역체제가 정말로 지속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설령 돈이 있다한들 늘 해외에 식량이 준비되어 있을지 결코 장담 못한다. 이것은 기초적인 사실이다. 그런데도 식량자급률 25%라는 위태로운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비교우위의 논리를 내세워 농사를 천대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사고능력을 상실한 정신상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고불능의 상태는 ‘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지배논리에서 한걸음도 벗어날 궁리를 하지 않는 정책결정자들에게는 고질이 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나라의 농정이 드러내는 사고의 불능 상태는 아마 유례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농산물 시장개방에 대한 대응책은 늘 영농의 대규모화를 통한 경쟁력 제고에 초점이 맞추어져왔고, 그 결과 대농, 즉 기업농의 육성과 소농의 퇴출이 농정의 일관된 목표가 되어왔다. 지금 국회에 상정되어 있는 농지법 개정안이라는 것도 그 골자는 자본을 가진 도시인들의 농지소유를 합법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소농의 소멸을 앞당기자는 것이다. 과연 이런 방식으로 한국농업이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지도 매우 의심스럽지만, 그보다도 이런 정책의 필연적인 결과가 나는 너무도 두렵다. 이런 식이라면 조만간 이 나라에서 농촌공동체와 농민이 사라져버릴 것임은 명확하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농민은 소농이며, 소농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가 마을이다. 그러한 농민과 마을이 소멸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그것은 인간생존의 토대 중의 토대, 즉 흙을 보살피고,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과 그들을 기르는 공동체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를 들어, 기계와 화학물질 의존을 불가피하게 하는 산업적 영농의 결과로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에서 흙(表土) 전체의 4분의 1이 유실되었고, 그 결과 빠르게 토지의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업의 논리는 토지에 대한 약탈을 불가피하게 한다. 흙은 원래 몹시 까다롭고, 취약한 성질을 갖고 있다. 흙의 이러한 본성을 잘 이해하고, 정성스럽게 보살필 수 있는 능력은 오래된 농촌공동체에 뿌리박은 자율적인 농민에게만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포식(飽食)의 시대일수록 우리는 ‘흙의 문화’야말로 사람다움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humanus)은 흙(humus)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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