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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독일의 나치주의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유대 과학으로 억압했다. 머튼은 과학의 보편성을 과학적 에토스라고 주장하면서 과학에 유대 과학과 독일 과학이 따로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논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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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머턴, 과학의 ‘에토스’와 민주주의
1910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남부 빈민촌의 유디인 이민 가족에서 한 소년이 태어났다. 이 소년은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마술 시범을 보여서 용돈을 벌기도 했지만, 다른 소년들과 달리 철강왕 카네기가 기증한 마을 도서관과 음악당에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마술을 좋아하던 소년은 열네살에 메이어 스콜니크라는 자신의 유디인 이름을 로버트 머민(아더왕의 전설에 나오는 마법사)으로 바꿨고, 머민이란 이름이 조금 진부하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이름을 로버트 머턴(Robert K. Merton)으로 바꾸었다.
롤 모델, 포커스 그룹 등 개념 만들어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제대로 된 학교교육이라곤 받지 못했던 머턴은 마술과도 같은 인생역전을 이루어냈다. 템플대를 졸업한 그는 1936년에 하버드대에서 영국 청교도주의 기독교와 실험과학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17세기 영국의 과학발전의 사회학적 측면’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머튼의 논문 심사위원회에는 과학사학자 조지 사튼, 사회학자 파슨스, 소로킨 등 쟁쟁한 학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머턴의 논문은 ‘17세기 영국의 과학, 기술, 사회’라는 제목으로 학술지에 출판되었는데, 소위 ‘머턴 테제’로 알려진 과학과 청교도의 관련은 1960~70년대를 통해서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머턴은 ‘롤 모델’,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sy: 믿거나 말한대로 실현되는 현상), ‘포커스 그룹’ 등 지금은 일상생활에서도 널리 쓰이는 개념들을 만들어낸 사회학자다. 그렇지만 그의 연구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0~40년대를 통해 발표한 과학사회학에 대한 논문들 때문이었다.
머턴은 1938년에 발표한 논문 ‘과학과 사회적 질서’에서 과학이 나치즘의 독일이나 스탈린주의의 소련과 같은 전체주의 사회에서 제대로 발전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면서, 그 이유를 전체주의 사회가 지향하는 바와 과학의 규범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데에서 찾았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1942년에 발표한 기념비적인 논문 ‘과학과 민주주의에 대한 소고’(뒤에 ‘과학의 규범적 구조’로 제목이 바뀜)에서 심화되었다. 이 논문에서 머턴은 과학이 다음과 같은 4가지 규범(혹은 가치)으로 표현되는 ‘에토스’로 나타내진다고 주장했다.
△보편주의: 과학의 모든 명제는 보편적인 기준에 의해서 평가함.
△집합주의: 과학의 발전은 사회적 협동의 결과이고 그 결과는 공동체에 귀속됨.
△무사무욕: 과학은 계급, 경제, 보상에 연연하지 않고, 지식 그 자체를 위한 지식을 추구.
△회의주의: 과학에서의 판단과 믿음은 경험적, 논리적 기준에 의해서 검증될 때까지 보류.
전체주의 지향점과 과학 규범은 양립 불가
나치는 복종과 독일 과학 우수성 강조하나
머턴 과학사회학은 회의주의 보편주의 주장
40년대 후반 미 대학 개혁운동에 큰 영향
과학의 에토스에서 민주주의 이상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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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사회학의 거장이자 과학사회학의 창시자 로버트 머턴. 그는 과학과 민주주의와의 관계에 대한 성찰에서 과학이 보편주의, 집합주의, 무사무욕, 회의주의라는 네가지 규범으로 구성된 에토스로 특징지워진다고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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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4가지 규범으로 나타내지는 과학의 에토스는 전체주의 사회와는 양립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전체주의 사회는 복종의 미덕을 강요하지 회의주의를 용인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또 독일의 나치주의자들은 과학은 민족적이고 따라서 과학에 우수한 독일 과학과 저열한 유대 과학이 있을 수 있다고 강조했지만, 이에 대해서 머턴은 보편주의에 역행하는 과학은 있을 수 없다고 항변했다. 당시에 과학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인 의미를 지녔는데, 실제로 1930년대에 과학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주장했던 빈(비엔나) 학파의 대표 쉬릭은 열성 나치 청년당원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머턴의 과학사회학, 특히 과학의 에토스라는 개념은 1940년대 후반에 미국 대학을 개혁하려 했던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 개혁가는 대학의 고등교육이 종교적인 분파주의를 탈피해서 정직하고 자유로운 탐구정신, 비판, 경험주의, 무사무욕, 보편성, 반(反)전체주의에 입각해서 개혁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러한 이념은 머턴이 강조했던 과학의 에토스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머턴의 과학사회학은 이러한 개혁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으며, 미국의 대학교육이 바뀌면서 머턴의 과학사회학은 더 큰 영향력을 획득했다.
과학자 사회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
1950년대 이후, 미국의 대학교육을 주도하던 이들에게 과학은 사적 지식이 아닌 공적 지식이었으며, 닫힌 담론이 아닌 열린 대화였고, 강압적인 권력이 아닌 민주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에 전쟁 연구를 지휘했던 하버드 화학자 제임스 코넌트는 전쟁이 끝나고 하버드 대학의 총장으로 부임한 뒤에, 이러한 과학적 이상에 입각해서 ‘과학의 정신’을 가르치는 것을 요점으로 한 교양 교육의 개편을 단행하기도 했다. (이때 코넌트가 고용한 조교가 나중에 <과학혁명의 구조>를 쓴 토머스 쿤이었다).
머턴이 제시한 과학자 사회의 에토스와 규범은 매우 이상적인 사회에서 통용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머턴은 민주주의 사회가 나아가야 할 이상향을 과학자 사회에서 발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머턴 자신도 이상적인 과학자 사회에 예외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머턴의 규범에 비추어 보면 유명한 학자와 무명의 학자가 공동이름으로 논문을 출판한 경우에 그 논문의 영예(크레딧)는 두 저자에게 절반씩 골고루 돌아가야 했다. 과학적 명성은 업적에 의해서만 평가되지 다른 요소가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머턴은 실제 과학자 사회에서 이런 논문이 대개 유명한 학자의 논문으로 기억되지 무명의 학자의 이름은 잊혀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곧 과학에서도 유명한 학자는 더 유명해지고 무명의 학자는 잊혀진다는, 부익부빈익빈의 경향이 존재했다.
머턴은 과학자 사회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부익부 빈익빈의 경향을 성경의 한 구절을 따서 ‘마테 효과’라고 명명했는데, 문제는 이 마테 효과가 이상적인 과학자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머턴은 사회학의 방법론을 사용해서 이 마테 효과를 설명할 수 있었다. 무명 과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공동으로 쓴 논문이 자신의 이름이 아닌 유명 과학자의 이름으로 기억된다는 것은 분명히 불공평하고 역기능적인 일이었다. 그렇지만 무명의 과학자가 단독으로 논문을 출판했을 때보다 유명한 학자와 공동으로 출판했을 때에 그의 논문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논문이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기억되기 때문에 그 논문에 실린 정보는 더 많이 확산되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마테 효과는 보편적인 과학 지식의 확산을 촉진하는 순기능적인 구실을 하는 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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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과학사 comenius@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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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턴과 그의 제자들은 과학의 에토스와 과학자 사회의 이상적인 규범을 설정하고 이 규범에 잘 맞지 않는 변칙(애노멀리스)을 하나씩 설명해 가는 과학사회학 프로그램을 수행했다. 이들은 이러한 방법론을 통해서 과학자 사회의 위계, 계층화, 우선권 논쟁, 성차(性差) 등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했다. 그렇지만 이들의 프로그램이 정점에 올라 있던 1970년대 후반에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이 등장했고, 이 새로운 이론은 머턴의 과학사회학을 순식간에 대치해 버렸다.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의 출발점은 과학이 우리의 다른 지식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듯이 과학자 사회도 우리 사회의 다른 공동체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머턴이 과학의 (이상적인) 에토스에서 민주주의 사회의 이상을 발견했다면, 사회구성주의자들은 ‘타협’ ‘갈등’ ‘논쟁’ ‘이해관계’와 같은 현실 사회의 작동원리에서 과학 지식과 과학자 사회의 특성을 발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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