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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30 19:54 수정 : 2006.01.18 17:26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7

쿠키 레이디를 뒤로 하고 다음 목적지인 버지니아 주 렉싱턴(Lexington)으로 가는 길은 상쾌했다. 노래에도 등장하는 블루 리지 파크웨이(Blue Ridge Parkway)를 타고 가기 때문이다. 애팔래치언 산맥 남부를 관통하는 이 길은 총 연장 750.4㎞로 경부고속도로보다 더 긴 아름다운 산길이다. 오늘 내가 진입하는 록피시 갭(Rockfish Gap)에서 시작해 노스 캐롤라이나 주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Great Smoky Mountain) 국립공원에서 끝난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은 45㎞ 구간만 같이 가는 데 그 동안 해발고도 3280 피트 (984m)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게 돼 있다.

철쭉은 많이 시들었지만 민들레는 한창이다. 블루 리지 파크웨이가 아름다운 것은 산맥 양쪽 아래로 탁 트인 전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오늘은 구름이 많이 끼어서 멀리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비가 안 오는 게 어딘가. 전날 밤 비가 내렸고 아침까지도 바이크 하우스에서 바라본 정상에는 비구름이 많았다. 쿠키 레이디를 도와주고 있는 50살의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 데비(Debie)는 “조금 있으면 해가 안개를 다 태워버릴 것”이라고 산사람의 지혜를 나눠줬다.

물기를 머금어 나무 둥치는 더욱 검고 나뭇잎은 눈부시게 햇볕을 튀겨낸다. 하늘과 산과 나무, 들꽃 그리고 길이 눈동자에 아로새겨진다. 이 길은 환상적 드라이브 코스여서 자동차 외에도 오토바이족들이 설쳐댄다. 미국에서는 바이커(biker)라고 하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뜻할 때가 많다. 한국의 폭주족 같은 분위기는 아니지만 할리 데이비슨(Harley Davidson) 가족 점퍼를 걸쳐 입고 폭음을 내며 산중의 정적을 산산조각내는 모습은 곱게 보이지 않는다.

차츰 앞을 쳐다보기가 무서워졌다. 또 어떤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는지 버럭 겁부터 나기 때문이다. 내 자전거는 관절염을 앓아서 기어를 변속하기가 무척 힘들다. 최저단 기어로 올라가야 하는데 바뀌지 않는다. 자전거에서 내려서 손으로 기어를 변속해야 하는데 그러면 짐의 무게에 못 이겨 자전거가 아래로 굴러내린다. 손에 검은 기름이 묻는 것에는 더 이상 개의치 않지만.

내리막에서 충분히 탄력을 받아 오르막을 많이 올라가줘야 나머지 오르막 길을 오르기가 쉬운데 최저단으로 바꿔놓은 기어를 고단으로 바꾸다간 다음에 최저단으로 바꿀 때 자전거에서 내려야 하니 그냥 저단으로 놓고 갈 수밖에 없다. 또 시속 30㎞ 이상을 내면 짐수레 때문에 균형을 잡기 어려워 핸들이 심하게 흔들렸다. 사고 나기 일보 직전의 위기를 여러 차례 모면하고는 절대 시속 30㎞ 이상으로 달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내리막도 손이 아플 정도로 브레이크를 잡고 있어야 하니 오르막이나 내리막 모두 고행길이다.


산속 정적을 조각내는 폭주족들

블루리지 하이웨이에서 내려와 56번을 거쳐 베수비우스(Vesuvius)에서 608번으로 우회전, 남강(South River)를 따라 달리는 길은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때로는 강물과 철길 사이로, 때로는 강물과 철길을 옆에 두고 말들과 소들이 풀을 뜯어먹는 평화로운 평평한 들판을 달려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부에나 비스타(Buena Vista)에서 우회전하는 순간 렉싱턴까지 숨이 턱에 차는 오르막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렉싱턴은 그 험한 길을 타고 가더라도 가볼 만한 곳이다. 인구 7천여 명의 소도시지만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군사학교인 버지니아 밀리터리 인스티튜트(Virginia Military Institute)와 역시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 워싱턴 앤드 리 대학(Washington & Lee University)이 있다. ‘워싱턴 앤드 리’ 중에서 리는 남부 동맹군의 총사령관 로버트 리(Robert Lee) 장군의 이름에서 따왔다. 나는 항상 미국 남부를 여행할 때마다 뿌리 깊게 남아 있는 남부동맹군에 대한 추모 정서에 당혹할 때가 많았다. 캔터키 주 페어뷰(Fairview)에 가면 남부동맹의 대통령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의 기념탑이 워싱턴에 있는 조지 워싱턴 기념비만큼 높이 솟아 있다. 리치몬드에서도 남부동맹군 병사들에 대한 기념탑을 보고 왔다.

남북전쟁의 사적이 몰려있는 렉싱턴 이 도시는 아직도 남부동맹을 추모한다
남북전쟁은 노예해방 전쟁이 아니라 중앙의 간섭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이다
남부동맹 대통령은 반역죄로 2년 복역한 뒤
보험회사 사장이 됐다 참 희한하다

더구나 워싱턴 앤드 리 대학은 원래 대학에 재정적으로 기여한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의 이름을 따라 워싱턴 칼리지로 개명했는데 로버트 리 장군이 죽고 난 뒤 리 자를 더 붙인 것. 이를 테면 미국 연방정부 입장에서는 적장인데 적장을 기리는 것을 허용한다는 게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 만약 한국전쟁에서 어느 한 쪽이 이겼으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미국의 남북전쟁은 특이한 전쟁이다. 일단 전쟁의 이름부터 확실치 않다. 북쪽에서는 ‘반란 전쟁(The War of the Rebellion)’ 또는 ‘노예제도 철폐전쟁(The War for Abolition)’으로, 남부에서는 ‘북부의 침략전쟁(The War of Northern Aggression)’ 또는 ‘남부 독립전쟁(The War of Southern Independence)’으로 부른다. 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니 그냥 내전을 가리키는 Civil War로 두리뭉실 넘어들 간다.

추앙받는 ‘로버트 리’ 장군

남부동맹군의 깃발이 아직도 휘날리는 이 도시에서는 당연히 남부 독립전쟁이다. 내가 도착한 이날도 한 행사장에서 남부동맹군의 군복을 입은 사람들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관광 안내센터에서 일하는 수전(Susan)이라는 중년 여성에게 “아니, 우린 남부군이 노예제 존속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나쁜 세력이라고 배웠는데 왜 이렇게들 추모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흥미로운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남북전쟁에 대한 세 가지 관점을 소개했다. 하나는 우리가 배운 대로 노동력이 필요했던 북부 공업지역과 노예노동이 필요했던 남부 담배 면화 농촌지역과의 대결. 두 번째는 주 정부를 간섭하려는 중앙정부와 자치를 지키려는 주 정부의 대결. 세 번째는 노예제도 철폐를 위한 전쟁. 그는 흑인의 입장에서는 세 번째 관점이 절대적으로 타당하겠지만 이곳을 비롯한 남부 주들은 두 번째 관점으로 남북전쟁을 바라본다고 설명했다.

그러니 지금도 남부동맹의 정당성을 믿어 의심치 않고 추모하는 게 당연한 일. 사실 중앙정부의 권한 축소, 주 정부의 자치 확대는 공화당의 정강정책으로 자리잡았다. 남북전쟁 당시 애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당이 바로 공화당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역사의 반어법이다.

남북전쟁이 희한한 전쟁인 게 전쟁 후 남부동맹의 데이비스 대통령은 2년을 반역죄로 복역한 뒤 풀려나 캐롤라이나 라이프라는 보험회사의 사장이 됐다. 한국전쟁에서 남한이 한반도를 통일한 뒤 김일성 주석이 평안도 보험회사의 사장이 된다는 걸 상상해보라. 로버트 리 장군도 워싱턴 칼리지의 총장이 돼 죽을 때까지 일했고 자신이 세운 대학 구내 교회에 묻혔다. 두 사람의 공민권 자체는 리 장군의 경우 사후 1백 년쯤 뒤인 1975년, 데이비스 대통령의 경우 1978년 연방 의회의 결의에 따라 회복됐다.

리 장군의 경우 사실 존경할 만한 구석이 많다. 미 육사의 전신인 미 군사학교(U.S Military Academy)를 차석 졸업한 그는 멕시코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미 육사교장으로 재직했다. 링컨 대통령이 그에게 연방군의 사령관을 맡아달라고 제안했을 정도로 남북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지휘관으로 인정 받았다. 리 장군은 노예제도에도 반대했다. 자신의 노예를 풀어 준 뒤 “노예제도는 어느 사회를 떠나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악이며 흑인보다 백인에게 더 해로운 악”이라고 썼다.

세명의 장군들과 인연맺은 도시

그가 남부군에 가담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출신 주인 버지니아 주에 대한 충성 때문이었다. 사실 버지니아 주는 청교도들이 1620년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플리머스(Plymouth)에 상륙하기 10년 전부터 식민지 건설이 시작된 미국 식민 역사의 원조.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이 요크타운에서 시작되는 것도 미 독립전쟁의 승전지이기도 하지만 요크타운 바로 옆에 있는 제임스타운이 바로 식민 역사의 발상지이기 때문.

남북전쟁을 이해할 때 북쪽의 인구 2천200만 명 대 남쪽의 900만 명의 대결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현격한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리 장군이 이끄는 남부군은 초반에 우세하게 전쟁을 이끌었다. 북부군은 나중에 한국에 신미양요를 일으키는 셔먼 장군(General Sherman)의 총력전 (Total War) 개념을 도입해 남부군 병사뿐만 아니라 남부군의 전쟁기반인 마을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워싱턴 근교 포토맥 강변에 있던 리 장군의 집은 전시 병원에서, 공동묘지로 바뀌게 되는데 이게 바로 케네디 대통령 형제가 묻혀 있는 앨링턴 국립묘지다. 이 묘지에서는 강을 건너 백색의 웅장한 링컨 기념관이 보인다. 이 구도야말로 남북전쟁 역사에 대한 정확한 기술이다.

렉싱턴은 미국 역사상 위대한 장군들로 꼽히는 세 명의 장군과 인연이 있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버지니아 밀리터리 인스티튜트 출신 조지 마셜(George Marshall) 국무장관의 기념관이 있고 그리고 오늘 역사 공부의 끝이 될 스톤월 잭슨(Stonewall Jackson) 장군의 집과 묘지가 있다. 스톤월 잭슨 장군은 남부군 장군들 중에서 리에 버금가는 존재로 추앙받고 있다. 원래 이름은 토머스 잭슨인데 1861년 불런(Bull Run) 전투에서 상관으로부터 아무리 많은 북부군이 공격해오더라도 고지를 고수하라는 명을 받고 그대로 버텼다. 감명을 받은 이 상관은 “저기 잭슨이 석벽(stonewall)처럼 버티고 있다”고 말했고 이게 그대로 이름이 돼버렸다.

홍은택/〈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hongdongzi@naver.com
그가 생전에 살던 집에 가봤더니 서재에 그가 쓰던 의자가 불과 30㎝ 떨어진 곳에서 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남북 전쟁에 참전하기 전 버지니아 밀리터리 인스티튜트의 자연사 과목 교수와 포병 교관을 겸했는데 다음날 학생들에게 가르칠 내용을 교과서에서 다 외울 때까지 면벽하며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과연 석벽이다. 학생들은 교과서를 달달 외워서 가르치면서 따라서 외우게 하고 질문은 허용하지 않는 그의 교수법에 대해 혀를 찼다고 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융통성 부족이 전쟁에서는 불퇴전의 용맹무쌍으로 둔갑하게 되고…. 전쟁이 아니었으면 매년 1만7천 명이 이 집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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