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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07 16:49 수정 : 2005.07.13 02:10

1971년 7월9일 헨리 키신저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이 극비리에 중국에 들어가 11일까지 머물며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회담하고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의 중국 방문계획에 합의했다. 7월15일 밤(미국시각)에 이 사실이 공표되자 세계는 크게 놀랐다. 세계사의 물줄기가 또 한차례 방향을 틀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앞서 4월 미국 탁구팀이 중국에 들어갔고, 미국이 대중 무역규제를 완화하는 등의 이른바 ‘핑퐁외교’가 시작됐다.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 것은 72년 2월(21~27일)이었다. 중국의 공산화 이래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며, 이로써 미국은 사실상 중국을 승인했다. 그러나 미-중간에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된 것은 지미 카터 정권 때인 79년 1월의 일이다.

냉전시기의 이와 같은 미-중 접근은 71년 8월 대규모 달러 매도 및 주가 폭락에 따른 미국의 달러방위정책 발표(닉슨 쇼크)로 상징되듯 2차대전 직후의 압도적 미국 우위가 사그라든 가운데 베트남전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미국이 발을 빼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사정을 반영하고 있었다. 중국 역시 60년대 말 이른바 중-소 분쟁으로 틈이 벌어진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카드가 필요했다.

72년 10월 유엔 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유엔 대표권이 승인되고 중화민국(대만) 정부의 유엔 추방이 가결됐다.

한국도 이런 국제정세 변동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71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어렵게 당선된 박정희는 8월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을 제안했고 72년 7월엔 ‘7·4 남북 공동성명’까지 발표됐으나, 그해 10월에 돌연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는 이른바 ‘10월 유신’을 단행함으로써 남북관계를 정권안보에 이용하고 영구집권까지 꿈꾸었다. 하지만 그것은 몰락의 전주곡이었을 뿐이다.

키신저는 1923년 독일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38년 미국에 이주했다. 2차대전 때 미군 정보장교로 참전해 독일에서 근무했으며, 닉슨 정권 때 중용돼 동-서진영 ‘데당트’에 기여했고 73년에는 파리협정 체결을 위해 노력하는 등 베트남전 종결을 위해 애썼다는 이유로 노벨 평화상까지 탔다. 그러나 그해 중앙정보국(CIA)을 통해 선거로 뽑힌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인민연합정권을 무너뜨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쿠데타를 지원했고, 미군의 인도차이나 무차별 폭격 책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며, 소련 및 중동제국과 에너지 외교를 펼치던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를 몰락케 한 록히드사건에도 관여했던 그의 수상은 노벨상에 대한 회의만 더욱 짙게 했을 뿐이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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