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7.07 17:02 수정 : 2005.07.13 02:09

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

1975년 파리 국립도서관 촉탁직원으로 일했던 한국인 박병선씨에 의해 약탈당한 조선조 도서들의 존재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고 반환논란이 일었을 때, 한국의 열악한 기록보관문화를 탓하면서 차라리 프랑스가 보관한 것이 다행이라고 한 일군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논리를 연장하면, 결국 인류 유산을 독점하고 보관할 자격을 지닌 자들은 오늘날 소위 강대국으로 거들먹거리는 제국주의 약탈자들뿐이다. 자기 비하와 모멸도 이 지경에까지 이르면 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침략을 당해도 쌀 만큼 형편없었던 것이 아니라 침략당했기 때문에 형편없어진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현실에 눈이 뒤집혀 이 분명한 진실을 거꾸로 보고 있다. 실은 고려와 조선 등 이땅의 역사적 유산들은 대부분 일본 제국주의자들까지를 포함한 저들 외세 약탈자들의 침략과정에서 파괴되고 소실됐다. 저들은 그 중 자신들에게 보탬이 되는 것들만 남겨 독점하고 그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만 공개하면서 지금까지도 반환을 거부한 채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1866년 7척의 군함에 1천여명의 병사를 실은 프랑스 로즈 함대가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병인사옥)에 대한 보복을 구실로 강화도를 침략(병인양요)했을 때 동행한 해군장교 주베르는 실토했다. “이곳에서 감탄하면서 볼 수밖에 없고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가난한 집에서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때 프랑스군이 눈독을 들인 것은 외규장각에 있던 은괴 19상자와 채색비단 장정의 어람용(임금 친견용) 의궤들이었다. 그들은 퇴각하면서 그곳에 보관돼 있던 1천여 종 6천여 책들 가운데 의궤 등 189종 340여 책을 약탈하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태워버렸다. 숱한 풍상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았던 임금 친필과 귀중본 등 조선조 500년 역사의 기록들이 다시 상당수 이때 영원히 사라졌다. 외규장각은 서울이 자료보관에 취약하다 하여 정조 때 천연의 요새 강화도에 따로 지은 6간 크기의 건물로, 국가가 편찬한 주요 도서 등 자료들 가운데 가치가 높은 것들을 보관한 조선 후기 왕실문화의 보고였다.

줄듯 말듯…궤변만 늘어놓는 그들

박병선씨가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발견한 조선조 자료들은 당시 프랑스군의 약탈품 가운데 살아남은 191종 297책의 의궤 등이었다. 1993년 한국을 방문한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그 가운데 하나인 <휘경원원소도감의궤> 1책을 들고와 약탈 도서들을 반환할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는 그때 프랑스, 독일, 일본이 한창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던 경부고속철도 부설공사 수주를 자국기업 테제베(TGV)가 따내도록 하는데 그것을 이용했다. 결국 테제베는 공사를 따냈으나 한국에 돌아온 의궤는 한권도 없었고, 지금도 반환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치밀한 글과 정교한 천연색 그림들로
조선 왕실행사를 낱낱이 남긴 어람용 ‘의궤’
프랑스군의 외규장각 약탈과 함께
이땅의 독보적인 기록문화도 파괴했으니
아직도 돌려주지 않는 저들의 뻔뻔함이란…

오늘날 한국은 기록문화 후진국으로 전락했으나 불과 한세기 전까지만 해도 이땅은 독보적인 기록문화를 지닌 나라였다. 1997년에 조선왕조실록이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거니와, 조선 기록문화의 또다른 꽃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눈독을 들였던 바로 그 의궤들이다.

의궤란 무엇이뇨?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들로, 이 방면의 전문연구자들인 김문식·신병주가 쓴 <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가 답한다. 의궤란 ‘의식’과 ‘궤범’을 합한 말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모든 주요행사를 선대에 행한 사례를 토대로 시행했다. 이를 위해 임시기구까지 만들어 모든 국가행사에 관한 일체의 내용들을 치밀하고 구체적인 그림과 글로 남긴 것이 의궤다. 행사에 동원된 인원과 그들의 신상자료, 각종 사용 물품의 크기와 재료, 색채, 궁궐이나 성곽 축조 기록에는 건물의 위치와 구조, 재료 구입처, 인부 명단과 일한 날짜, 품삯까지 기록했다. 요강, 대야 몇개 저고리 몇벌까지 적어넣었고, 담당자들을 모두 실명으로 밝혔으며, 비용도 하나하나 따져 남는 돈을 환불하기까지 하는 등 고도의 투명성을 자랑했다.

김홍도 · 김득신…예술 그 자체

오늘날의 우리는 이를 통해 특정 행사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고 당시의 건축물들을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다. 관청의 소속과 소관업무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고 지급된 임금과 물품을 통해 당시의 물가동향까지 파악할 수 있으며, 복식과 음식문화도 고스란히 되살려낼 수 있다.

의궤는 사진이 없던 시대의 정교한 시각 기록물일뿐 아니라, 김홍도 김득신 등 당대 최고의 화원들이 참여한 그림들은 그 자체로 뛰어난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화성능행도’ 8폭 병풍 중의 ‘봉수당진찬도’나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 중의 왕의 행차, 기명도, ‘대사례의궤’ 등의 단아한 천연색 그림들은 수백명 등장인물들의 제각각 몸짓이나 표정까지도 잡힐듯 정교하고 생생하다. 사용한 종이와 장정도 프랑스군이 놀라고 부러워할만큼 고품질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이런 의궤를 제작하고 보존한 곳은 조선뿐이다.

기왕에도 이런 의궤들 중 일부가 단편적으로 대중에게 소개됐으나, <…의궤>는 방대한 분량을 학문적인 관점에서 실사·연구해 다양한 시각자료들과 함께 독특한 판형에 종합·정리해내는 새 지평을 열었다. 왕실의 태를 봉안한 기록인 ‘태실의궤’, 왕실결혼 기록인 ‘가례도감의궤’, 수원 화성 축조 기록인 ‘화성성역의궤’, 악기에 관한 ‘악기조성청의궤’, 임금 초상화에 관한 어진의궤 등 12가지 분야 의궤들을 선정해 재구성하고 해설했다.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유례없는 기록물의 편찬, 보관, 수정과정까지를 기록한 ‘실록청의궤’도 있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