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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당시 사분오열돼 외세 침략에 시달리던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장기적으로 로마 공화정을 재건한다는 이상을 품고 있었다. 그림은 <군주론>이 씌어진 15세기 이탈리아의 정치상황을 보여주는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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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군주론’
서구 정치사상사에서 유럽의 근대가 유토피아 사상과 현실주의 사상의 동시적 출현을 특징으로 한다는 사실은 진정 흥미로운 현상이다. 1516년 영국의 인문주의자인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출간했고, 그보다 몇 년 일찍 1513년 말 피렌체의 인문주의자인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가 오늘날까지 현실주의 정치사상의 원조로 읽히는 <군주론>의 원고를 완성했다. 이런 사실은, 그 뒤 서구에서 분출하여 세계사적으로 팽창된 근대가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가 교차하는 야누스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근대 세계사를 사상사적으로 예시한 셈이었다.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본격적으로 감상하기에 앞서 내겐 마키아벨리에게 항상 감사하는 개인적 체험이 있다는 점을 먼저 말해야겠다. 학문적 삶과 그 외로움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고백이 미국 유학 중에 깊은 위로가 되었으며, 귀국한 뒤에도 연구실의 외로움을 달래는 데 커다란 힘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미국의 버클리대학에서 보낸 8년의 기간 중 가장 외로웠던 때는 겨울방학, 특히 연말연시를 전후로 한 시기였다. 방학과 함께 모두들 뿔뿔이 흩어지고 나면, 대학도시가 흔히 그렇듯이 학교 캠퍼스는 물론 심지어 시 전체가 텅 빈 느낌이 들곤 했다. 이러한 외로움 속에서 언제부턴가 나는 서양 정치사상가들의 저작을 읽는 행위를 직접 사상가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행위로 바꿔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령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읽다 보면 때로는 고전을 읽고 해득하는 기쁨보다 지루하고 따분한 권태가 찾아 들기도 했다. ‘내가 왜 이러한 책들을 읽어야 하는가?’ ‘이러한 책들이 현재의 세계와 나아가 한국의 정치현실을 이해하는 데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등 자기회의가 끊임없이 나의 지친 영혼을 잠식하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권태와 지루함을 잊기 위해서 이제 나는 그들이 나를 방문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토요일은 루소와 함께, 일요일은 마키아벨리와 함께, 월요일은 플라톤과 함께. 그들이 나의 아파트를 찾아와 나와 대담을 하는 날로 생각하는 환상 속에서 고전을 읽는 지루하고 딱딱한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했다.
후일, 나도 모르게 저절로 생겨난 듯한 이러한 환상이 실상은 <군주론>을 집필한 과정에 대해 마키아벨리가 친구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을 읽고 난 뒤 은연 중에 되새김질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서재에 들어간다. …적절히 단장을 한 뒤, 옛 선조들의 궁정에 들어가면 그들은 나를 반긴다. …나는…그들의 행적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 이유를 캐묻는다. 그들은 정중하게 답변을 한다. 네 시간 동안 거의 지루함을 느끼지 않으며…나 자신을 완전히 선조들에게 맡긴다.” 이처럼 마키아벨리가 자신이 복무하던 피렌체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메디치 왕정에서 쫓겨난 뒤 강요된 칩거생활의 외로움을 로마시대의 고전을 읽음으로써 잊고자 했던 과정에서, 근대 현실주의 정치사상의 정수인 <군주론>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치 영역의 독자성과 자율성 역설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 정치사상의 주된 특징은 무엇보다도 정치 영역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역설했다는 데 있다. 즉 마키아벨리는 종교적 가치나 윤리적 규범에 대한 고려를 (거칠게 표현하면) 싹둑 잘라버리고 오직 권력의 획득·유지·팽창만을 중심으로 정치현상을 분석·조망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처음 대하는 독자는 마키아벨리의 다음과 같은 조언과 주장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군주는 잔인하다는 악평쯤은 개의치 말아야 한다.’ ‘선행은 될수록 천천히 자신의 이름으로 베풀고, 악행은 가급적 부하의 이름으로 또 재빨리 저지르는 것이 낫다.’ ‘인간이란 어버이의 죽음은 쉽게 잊을 수 있어도 자기 재산의 손실은 여간해서 잊기 어려운 법이다.’ ‘인간들이란 다정하게 안아주거나 아니면 아주 짓밟아 뭉개버려야 한다.’
교활함, 이중인격, 악의 교사…
마키아벨리는 이런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영혼의 평온과 공동체 평화를 위해
일정정도 위선을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구절들로 인해 역사적으로 마키아벨리는 ‘교활함’, ‘이중인격’, ‘불신의 대명사’, ‘악의 교사’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 정치사상이 일상생활에 적용될 것을 의도한 것이 아니고, 다만 정치적 효율성과 유용성을 언제나 ‘국가 이익의 추구’라는 목적과 ‘정치’라는 영역으로 제한하여 추구하고자 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주의로 알려진 마키아벨리 사상에도 이상주의적인 면모가 강하게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마키아벨리는 당시 사분오열되어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던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과 (장기적으로) 로마 공화정의 재건이라는 이상을 품고 있었다. 다시 말해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자신이 희구하는 이상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과 전술을 채용해야 하는가’라는 방법론의 문제에 몰두했고, 이러한 실천적 감각은 현실정치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통해 강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그를 몰고 갔다. 이처럼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또는 주체)가 바로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신생군주라는 영웅, 곧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역사가 이성의 간지(奸智)를 통해 활용하는 그런 영웅이었다.
또한 마키아벨리의 신생군주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통해 현실정치의 모든 면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동시에 자신은 현실정치의 부패와 타락으로 오염되어서는 안 되는 역설적인 역할을 요구받았다. 이 점에서 마키아벨리가 갈구했던 신생군주 역시 현실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이상주의적 면모를 지닌 행위자로서 통상적인 선악 판단의 잣대를 넘어서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 사상은 당대의 사회는 물론 지금까지도 세간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제시한 일견 반도덕적이고 악명 높은 조언들은 당대 군주나 정치지도자들간에서 권력의 획득·유지·행사를 둘러싸고 일어나던 투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사악함과 기만성이 드러났다면 이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정치현실이 그러한 원리에 따라 규율되었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적 면모도 강해
그러나 현실의 정치지도자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인간의 사악함을 직시할만한 용기를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경우에 인간은 이처럼 진실을 감당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또는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알고도 모르는 척하며, 친밀한 사이에도 속고 속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이는 개인과 개인의 사사로운 관계뿐만 아니라 정치공동체에도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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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다수는, 일본인들이 과거 제국주의시대에 자신들이 저지른 참혹한 행위를 잊고 싶어하고 그 때문에 역사를 은폐하거나 날조하듯이, 한국 군대가 베트남전에서 어떠한 잔혹행위를 저질렀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기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슬퍼하지 않고 사람을 죽였는데도 참회하지 않는 비정한 인간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곧 사회가 적나라한 진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까뮈의 <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정치세계에 만연된 위선의 탈을 벗기고 정치현실의 진면목을 명료하게 묘사하였다. <군주론>에 드러난 적나라한 정치현실에 관한 진실을 당대의 군주나 오늘날의 현실 정치가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들 또한 믿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대신해서 마키아벨리를 규탄하는 것, 곧 속죄양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소크라테스가 역설한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self-knowledge)은 개인의 경우는 물론 공동체의 경우에도 고통스럽고 성취하기 힘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일정한 정도의 위선은, 인류 역사가 보여주듯이, 영혼의 평온과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필요불가결한지도 모른다. 이것이 현실주의 정치사상에 대한 우리의 격렬한 비난이 우리 자신에게 되돌려주는 교훈이다.
50자 서평
◇ 박상진(41·부산외대 이탈리아어과 교수)
“절대 고독 속에서 행하는 결단과 실천만이, 고정된 관념으로는 결코 건드릴 수 없는 현실의 유연한 지느러미를 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그것이 <군주론>에서 배우는, 개인이 현실에 대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 김창한(29·인터넷 ‘장미와 주판’
www.sophy.pe.kr 운영위원)
“마키아벨리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알몸을 발설하고만 악동의 후예. 너도 봤지! 정치의 맨 몸뚱이에 박힌 핏빛 문신을: 술책이 진실을 이긴다.”
◇ 양보숙(27·인터넷 교보문고 예술분야 머천다이저)
“이미 하나의 세계인 나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한 강력한 자아 찾기. 올바른 군주의 모습 속, 바라는 자아의 모습 가득.”
◇ 조지형(27·태동고전연구소 한학연수 3학년)
“냉혈 이성에 기반을 두고/ 법(法)-세(勢)-술(術)을 통하여/ 국가 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위한/ 최고 군주의 국가 운영 지침서.”
▽ 다음주 이후 고전(<돈키호테> <종의 기원> <사기>(사마천))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cheolwoo@hani.co.kr
서평자 추천 도서
군주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문지영 옮김
까치 펴냄(2003), 8000원
(쉽게 평이하게 번역, 중요 용어 해설이 실려 있다)
군주론·전술론 외
이상두 옮김
범우사 펴냄(1995), 8000원
(<군주론>과 다른 저작들이 번역돼 있다)
군주론- 강한 국가를 위한 냉혹한 통치론
강정인·엄관용 옮김
살림 펴냄(2005), 8900원
(전반적 해설과 함께, <군주론> 주요 구절을 발췌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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