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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와 자오지 |
치우와 자오지/
“자오지 천왕이 황제를 정벌하여 신하로 삼았다. 이것을 탁록 들판에서 있었던 대첩이라고 한다.”(원동중 <삼성기>에서)
“치우가 병사를 일으켜 황제를 토벌했다. 황제가 곧 응룡을 시켜서 기주 들판에서 공격하라고 했다.”(<산해경> 제17권에서)
배달임금 중 차이나 옛글에 나오기로는 ‘치우’(蚩尤)가 처음이다. ‘치우’란 환웅조선 14세 ‘자오지 환웅’(慈烏支 -)이다. ‘자오지’가 차이나로 쳐들어가 ‘황제 헌원’(黃帝 軒轅)을 사로잡았다.
으뜸글이 <삼성기> ‘서전려형’에 실렸다. 여기엔 ‘자오지’가 “작란했다” 곧, “빼앗았다가는 넘겨주는 일들”이라고 했다. 치우의 본국 존호가 ‘자오지 천왕’이다. 당시 차이나땅 임금이었던 ‘염제 신농’이 쇠약함을 보고 하늘뜻을 물어 서울을 ‘신시’에서 ‘청구’로 옮기고 병사를 일으켜 색도로부터 회수와 대산 사이를 점령했다. 이 무렵엔 염제 신농 뒤를 이어 ‘황제 헌원’이 임금자리에 올라 있었다. 치우 천왕이 탁록으로 들어가서 헌원을 사로잡았다. 이를 ‘탁록 대첩’이라고 한다. 사로잡힌 황제가 신하 되기를 맹세하매 살려주었다. 사로잡았으나 살려준 것이 치우의 ‘어짊’인데 이를 ‘홍익인간’이라 했다.
치우가 탁록을 점령하고 다시 남정에 나서 유망의 서울 ‘공상’에서 ‘천제’에 올랐다. 이때 헌원이 지난날 탁록전 치욕을 씻어보려고 서둘렀으나 100리 밖으로 쫓겼다. 치우가 탁록에 성을 쌓고 드넓은 회대땅(중원)을 다스리니 헌원의 부하들이 모두 신하로 일컫고 공물을 바쳐 왔다. 헌원이 외롭게 쫓긴 지 10년이었고 그 사이 전투가 73회였다.
나중에 치우가 하늘과 민심을 살피고서 허물없는 백성을 마구 죽일 수 없다며 군사를 거두는데, 부장 하나가 헌원군에 잡힌다. 이를 <산해경>이 치우를 사로잡았다고 왜곡했다. 치우 무덤이 산둥 동평군 수장현 감향성에 있고(한서 지리지), <진천문지> <한서병장도>에 ‘치우깃발’ 모양과 함께 ‘군기’로 삼은 기록이 있다.
월드컵 축구 때 ‘붉은악마’가 ‘자오지 셔츠’를 입고 응원한다. ‘홍익장군’ ‘자오지천왕’이 나았겠다. 자오지 병사의 큰활(大弓)을 차이나 겨레가 두려워했다. ‘大弓’을 포개니 ‘이’(夷)가 되었다. ‘동방 대궁인’ 곧 ‘동이’(東夷)가 여기서 나온다. 배달겨레가 활쏘기에서는 선수다. 려증동/경상대 명예교수·배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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