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14 20:09
수정 : 2005.07.28 15:59
역사로 보는 한주
1945년 7월17일부터 8월2일까지 독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 미국, 영국, 소련 등 전승국 정상들이 모여 끝을 향해가고 있던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했다. 포츠담회담은 주로 이미 패전한 독일의 영토 재분할과 각국 국경획정, 배상 등에 초점이 맞춰졌고, 7월26일엔 13개 항의 대일본 항복권고선언(포츠담선언)이 발표됐다.
포츠담선언에는 당시까지 일본에 대해 중립입장을 유지한 소련이 빠지고 미·영·중 3국이 서명했다. 소련은 8월8일 대일 선전을 포고한 뒤에야 이 선언에 가담했다. 미국은 당시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해 소련의 참전을 요구했고, 소련은 대일참전 조건으로 홋카이도 분할통치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담 직전인 7월16일 미국이 뉴멕시코주 알라모고도 인근 사막 트리니티에서 최초의 원폭실험을 실시해 성공했다. 의기양양해진 미국은 소련의 홋카이도 분할통치론을 깔아뭉갰다. 결국 그들이 분할한 곳은 엉뚱하게도 패전국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 한반도였다.
포츠담선언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13조)하면서, 일본영토를 ‘혼슈와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 등 4개 섬과 전승국들이 정하는 작은 섬들로 국한한다’고 못박았고(8조), 전범자 처벌(10조), 전쟁주도세력 제거(6조) 등의 내용을 담았다. 한반도와 대만에서 일본군이 즉각 철수하라는 내용도 명기됐다. 이 선언의 사실상의 대행자 미국은 나중에 자국 이해를 앞세워 6조, 10조에 해당하는 내용 처리는 흉내만 냈다. 오늘날의 ‘독도문제’ 뿌리도 8조까지를 포함한 포츠담선언 내용의 자의적 처리에 이어져 있다.
일본은 선언 발표 이틀 뒤인 7월28일 이를 묵살키로 결정했다. 이유는 천황제 유지(국체호지)를 보장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애초 미국이 작성한 초안에는 천황제 유지 조항이 들어 있었다. 결국 8월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고, 8일 소련이 일-소 중립(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만주로 진격했으며, 9일엔 나가사키에까지 원폭이 투하됐다. ‘조선반도 사수’를 꾀하다 다급해진 일제는 9일에 이어 14일 다시 열린 ‘어전회의’에서 ‘국체’문제는 애매하게 놔둔 채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천황제 집착을 포기하고 포츠담선언 수락을 1주일만 앞당겼더라도 한반도와 그 주변 운명은 지금과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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