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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14 20:39 수정 : 2005.07.14 21:45

몇몇 가맹국에게 EU는 ‘애물단지’ 가 됐다 대다수 유럽국가에게는 ‘세계화’에 대처할 절실한 수단이다 EU는 평화적 지역통합의 비전이며 사회경제적 실실 민주주의의 대안이다 그 선택안이 있어 우리의 삶은 희망적이다

6월28일부터 7월5일까지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제425차 ‘잘츠부르크 세미나’. ‘EU(유럽연합): 통합과 확대의 도전’이라는 주제로 26개국 55명의 전문가들이 열띤 토론을 벌인 그 현장을 지켜봤다. 지난 5월29일 프랑스, 6월1일 네덜란드의 국민투표에서 EU 헌법안이 부결된 직후라서 그런지 역시 가장 중요하게 제기된 문제는 헌법안 부결사태였다. 이번 헌법안 부결이 과연 EU 절체절명의 위기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저 ‘또 하나의 위기’일 뿐인가 하는 ‘위기의 심각성’에 관한 논쟁이 열기를 뿜었다.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 특별 고문인 도미니크 모이시 등은 이번 사태가 ‘전후 유럽체제의 종말’을 표상하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주장했고, EU 집행위원회 수산해양정책 총국에서 일하고 있는 존 리차드슨 등은 이번 사태가 과거에도 여러 차례 극복된 바 있던 ‘일상적인’ 위기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두 입장 모두 유럽의 발전을 위해 이번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잘 되면 내 덕, 못 되면 브뤼셀 탓

두 번째 쟁점은 이번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EU 헌법안 부결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대다수의 참석자들은 이번 부결사태가 헌법안 문구(text)의 문제, 다시말해 헌법안에 어떤 요소들이 포함되고 어떤 요소들이 빠졌는가 하는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EU가 발전되어 온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적 맥락(context)과 관련된 문제라는 것에 동의하였다. 이러한 차원에서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프리드리히 퀴블러 법대 교수는 이번 EU 헌법안에 대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국민투표가 EU 헌법안을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한 심판이었다는 진단을 내놓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부결이 이루어진 국가내 집권당의 실정과 무능, 그리고 그로 인한 대정부 신뢰 추락과 경제불황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헌법안이 통과되고 EU의 확대가 계속될 경우 새로운 회원국들로부터의 대량 이민이 이루어지고, 이는 기존 회원국들 내의 일자리 상실로 이어질 것이라는 EU 자체에 대한 회의와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EU 시민들’은 국내정치와 EU 차원의 정치를 구분할 능력을 결여했고, 결국 EU 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는 각국 정부의 실정에 대한 심판으로 변질되어 EU는 희생양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부결사태는 그간 오랫동안 유럽 각 국가에서 팽배했던 분위기, 즉 “잘 되면 자국 정부 덕분, 못 되면 브뤼셀(EU) 탓”이라는 지배적 정서를 확인시켜 준 것이었다. 동시에 덴마크 재무부에 근무하는 메트 필텐보르그 실장 등은 헌법안 자체가 일반 시민들에게 제대로 공지·홍보·설명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는 각국 정치 엘리트간의 밀실협약, ‘저 먼 동네 브뤼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불투명한 정책결정과정 등으로 비판받아 온 EU의 민주주의 결핍 문제가 마침내 EU 발전에 결정적인 제한·억지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현재 EU가 처한 ‘위기’가 ‘텍스트’로서의 헌법안 보다는 전반적인 역사적, 정치·경제·사회적 ‘컨텍스트’와 관련된 것이라면 그것과 관련하여 우리는 또한 EU가 EU 내외의 여러 상이한 정치적 주체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라는 인지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인지적 맥락’은 “EU가 당신네 나라에게 어떠한 효용을 가지는가?”라는 다분히 공리주의적 질문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번에 부결사태를 겪은 (혹은 초래한) 프랑스, 네덜란드 등 일부 EU의 오랜 가맹국들에게 과거 EU는 자신들의 경제·정치적 비전을 실현하는 도구이자 수단이었고 실질적인 이익을 제공해 주는 장이었다. 그러나 이제 EU는 부담스럽고 다루기 힘든, 혹은 자신들의 의사에 반해 자신들을 지나치게 구속하는 (일부 프랑스인들의 표현처럼 ‘영미식 세계화를 강요하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EU가 ‘유럽’도 아닌 지역으로까지 무리하게 확대를 시도함으로써 유럽의 정체성이 희석·파괴되고 불필요한 대량이민 등 부작용만이 초래될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에 반해 EU에 2004년에 새로이 가입한 폴란드, 헝가리를 비롯한 10개국, 그리고 앞으로 그 언젠가 이루어질지 모르는 가입을 꿈꾸고 있는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등 현재 EU의 ‘이웃들’에게 EU는 ‘희망’이다. 심지어 그들에게 EU는 ‘만병통치약’일지도 모른다. 거기에만 가입하면 외국인 투자 급증, 소득 향상, 경제발전, 산업화, 정치 민주화 등의 진전을 통해 꿈에도 그리던 ‘유럽’의 일원, 당당한 선진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울러 터키상공인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 페킨 바란의 말처럼 EU에 가입하기 위한 자격을 성취하기 위해 추진되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정치·경제 개혁 과정에서 EU는 그동안 그 어떤 내부적 요인도 제공하지 못 한 엄청난 개혁 추동력을 공급하고 있다.

비록 EU의 몇몇 가맹국들이 EU를 ‘애물단지’로 여기고 구시렁거리고는 있지만 대다수 유럽 국가들에게 아직까지 EU는 미우나 고우나 점증하는 ‘세계화’ 그리고 국제적 수준의 경쟁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유럽의 많은 지도자들의 담론에서 ‘세계화’는 “중국과 인도의 급부상”과 동의어가 되었고, 그에 대처하는 전략은 EU의 강화·심화를 통한 “경쟁력 강화”와 “정치적 결속”으로 요약·정리된 지 오래다 (예컨대,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6월23일 유럽의회 연설). 오직 EU라는 단일하고 강력한 경제·정치 공동체를 통해서만 각지역의 신흥 경제강국들과 경쟁하여 ‘세계화’의 물결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절박감은 2차대전 직후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ECSC(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이끌어낸 것에 비견될 정도로 절실하고 강력한 것이다.

유럽 바깥의 다른 국가들에게 EU는 무엇인가? 많은 국가들에게 EU는 미국의 일방주의를 견제·반대할 수 있는 ‘균형추’다. 냉전 이후 단극체제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세계 유일무이의 초강대국 미국, 특히 9·11 이후 강화되어 온 부시정부의 일방주의에 대항하는 저항축이다. 적어도 한동안 그렇게 인식되어 왔다. 특히 이라크전을 둘러싼 미국과 유럽의 갈등, 작년 10개 새 회원국들의 EU 가입, 유럽헌법안 인준절차의 진전 등은 바야흐로 EU가 제대로 된 대항세력으로서 미국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다른 나라들의 기대를 한껏 부풀렸다. 그러나 헌법안 부결사태 등 최근의 ‘위기’는 ‘균형추’로서의 EU에 깊은 회의를 제기하고 있다.

‘세계화=미국화’ 등식을 깨라

한편 최근 들어 미국에게 EU는 회복해야 할 ‘대서양동맹’의 파트너로서 그 중요성이 점차 강조되고 있다. 부시 2기 국정 담당자들에게 손상될대로 손상된 미국-유럽간 관계의 회복은 최우선 과제 중 하나다. 물론 현재 유럽 내의 사정으로 말미암아 부시 정부의 이러한 구애가 먹혀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냉전시대 소련 및 공산권의 팽창 견제에 강력한 역할을 했던 대서양동맹을 이제 냉전 이후 어떻게 진정한 범세계적 파트너십으로 전환·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는 미국에게 대단히 중요한 숙제가 되고 있다. 오랫동안 <워싱턴 포스트> 유럽주재 특파원을 지냈고 현재는 뉴욕에 본부를 둔 미국 독일협의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윌리엄 드로작은 미국이 더 이상 세계에 “방자하고 외로운 초강대국”으로 비치기를 원치 않으며 일방주의적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 미국-유럽간 파트너십의 복원·발전은 극히 중요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잘츠부르크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남은 한 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대한민국에게 EU는 과연 무엇인가? 대한민국은 EU의 가맹국이 아니므로 ‘애물단지’일 리는 없다. EU에의 진입을 꿈꾸는 EU의 이웃들처럼 EU는 우리에게도 역시 ‘희망’이자 ‘꿈’으로 다가온다. 서로 살륙을 일삼던 국가들이 평화적으로 공동체를 이루어 통합과 협력을 증진시키는 EU ‘모델’은 우리에게 중요한 비전이다. 남과 북의 통합, 동북아의 협력, 세계의 평화를 희구하는 우리에게 EU는 귀중한 모델이다. 행담도 스캔들, EU의 ‘위기’ 등 국내외적 사정으로 유럽통합을 벤치마킹하려던 우리 정부의 동북아시대위원회는 정체성 위기에 빠져 버리고 말았지만 여전히 EU는 우리에게 평화와 번영의 ‘희망’으로 다가온다. 동시에 EU는 우리에게 미국식 민주주의 모델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는 ‘대안’이다. 실질적 차원을 경시하지 않는 유럽식 민주주의는 사회 양극화, 계급간 불평등의 심화로 인해 그 사회경제적 기반이 심각하게 잠식되고 있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중요한 경고를 주고 있다. 제대로 된 복지국가를 경험조차 해본 적이 없는 우리에게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로의 무모한 돌진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또한 EU는 좀더 자주적 외교정책을 추구하려는 대한민국에게 중요한 외교적 파트너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미국-유럽간 대서양 동맹의 범세계적 파트너십으로의 변환은 양면성을 가진다. 범세계적 파트너십의 발전은 한편으로 부시정권 1기에 심각하게 노정되었던 ‘일방주의’의 약화, 그리고 그 핵심축인 신보수주의 세력을 희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범세계적 파트너십이 유럽의 ‘미국으로의 동화’ 곧 ‘미국화’를 의미한다면 유럽-미국간 파트너십은 미국 주도 신자유주의의 더욱 공세적·적극적인 확대와 심화에 불과할 것이다.

EU는 우리에게 평화적 지역통합, 지역적 민주주의 공동체의 ‘비전’이며 사회경제적·실질적 차원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의 ‘대안’이다. ‘세계화’가 점점 ‘미국화’의 동의어가 되고 있는 오늘, EU가 또다른 미국으로 ‘세계화’되지 않고 고유한 ‘유럽모델’로 남아 평화와 번영을 성취해 나가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미동맹 외에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외에는, 민족주의적 충돌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짐짓 생떼를 쓰는 이들에게 EU는 “대안이 있다”는 것을 웅변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대안’의 본질은 ‘선택’이며, ‘선택’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삶은 희망적이며 역사는 종언을 고하지 않을 것이다. 김선혁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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