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14 22:40
수정 : 2005.07.14 23:01
포퍼의 정치철학은 과학철학과 동전의 양면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 강의 듣고 감명받아
‘반증 가능성’ 과학적 방법론으로 명성 얻어
역사 흐름은 ‘개인의 자발적 선택이 의도하지 않는 결과’
⑨ 칼 포퍼-반증 가능성과 열린사회
과학철학자 중에서 일반 과학자들에게 잘 알려진 사람은 드물다. 그중에서도 칼 라이문트 포퍼(1902~1994)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포퍼는 과학연구 과정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대표이론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라도 그것의 문제점을 주저없이 지적하고 새로운 대안이론으로 나아가는 비판적 연구태도를, 특정 지적 활동을 ‘과학적’으로 만드는 방법론적 핵심으로 강조했다. 이 점은 과학자들이 어떤 편견으로부터도 자유로우면서 순전히 경험적 근거와 그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논리적 추론의 작업으로 과학연구 활동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고, 진리탐구의 과학자로서의 삶에 일종의 도덕적 숭고함까지 부여한 것이었다. 이러한 포퍼의 과학관이 과학자들에게 매력적이었음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포퍼는 또한 매우 영향력 있는 정치철학자였다. 전체주의와 역사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은 적극적으로 자유주의를 옹호하지는 않으면서도 결국에는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자발적 선택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역사의 흐름을 파악한다.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열린 사회’에 대한 그의 강조가 실은 ‘반증 가능성’을 과학이론의 덕목으로 본 그의 과학철학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포퍼의 과학철학과 정치철학은 동전의 양면처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포퍼는 1902년 7월28일 빈에서 학구적 분위기의 유대계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포퍼가 지적 성장기를 보낸 빈은 그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유럽 문화와 새로운 생각의 중심지였고 포퍼는 이런 환경을 최대한 활용해서 자신의 독특한 철학세계를 구축해나갔다. 우선 그는 1919년 빈대학 재학 때 사회주의학생동맹에 가입하여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짧은 활동을 하다 탈퇴한다. 스스로의 회고에 따르면 젋은 포퍼를 실망시킨 것은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직된 사고, 특히 단선적 발전론에 따라 파시즘을 궁극적인 공산주의 도래 이전의 불가피한 단계로 지지한 역사주의적 관점이었다. 또한 완전히 자본주의화하지 않은 러시아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고 레닌의 경우처럼 기존 이론에 적당한 보조가설을 덧붙여서 반증을 피해가는 모습도 포퍼에게는 ‘과학적’ 태도로 보이지 않았다.
한편, 포퍼는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심리학에 심취하여 한때는 아들러 밑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한 사회사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는’ 정신분석학 이론의 모호함에 실망하게 된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은 욕구로 설명하고, 같은 상황에서 물에 뛰어들기를 주저한 사람은 열등감의 결과로 설명하는 아들러의 이론은 어떤 경험적 사실이 등장해도 틀린 것으로 판명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것이었다. 결국 포퍼는 마르크스주의는 좀더 평등한 사회에 대한 숭고한 목표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경험적 반대 증거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이론을 유지하였기에, 그리고 정신분석이론은 인간 심리에 대한 여러 통찰력 있는 분석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모호해서 분명한 예측을 내놓지 못하기에 실망했던 것이다.
전체주의와 역사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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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포퍼는 과학이론에 대한 반증을 통해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갈랐다. 누군가 유령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반대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탓에 곧 반증 가능성이 제로여서 과학 이론을 벗어난 비과학적 일이라 해석한다는 것이다. 포퍼는 점성술, 형이상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주의 등을 반증이 불가능한 사이비 과학으로 분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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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아들러의 심리학에 비해, 포퍼가 직접 강의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과학이론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분명히 갖추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그 당시까지도 매우 성공적이었던 뉴턴 물리학에 대해 용감하게 반기를 들고 전혀 새로운 시공간에 대한 이론을 제안하였고, 그 이론이 맞을 경우 예상되는 결과(예를 들면 일식에서 별빛의 휨 현상)에 대해 대담한 추측을 제시하고 이를 관측으로 검증해보자고 제안했다. 아인슈타인의 이런 비판적 태도는 포퍼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나 정신분석학 이론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고 이는 곧바로 포퍼의 반증주의적 과학철학의 핵심을 이룬다.
포퍼는 슐리크를 중심으로 후일 논리실증주의로 발전할 생각을 토론하던 ‘빈 모임’(비엔나서클)의 멤버들과도 교류를 가졌다. 그러나 포퍼는 슐리크와 카르납이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아 과학용어의 의미 문제에 천착하는 것에 반대했고, 경험적 사실의 축적을 통해 과학의 진보를 설명하려는 시도에 반발했다. 포퍼는 물론 모든 지식의 근원에 경험이 놓여 있음을 인정했지만, 그에게는 경험적 사실을 베이컨 식으로 하나하나 모아 일반명제로 귀납을 하는 방식이 아니라 개별 과학자의 자유롭고 대담한 추측을 통해 제안된 가설을 경험적 증거가 결정적으로 반증하는 방식을 통해 과학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증을 통과한 이론은 오직 더 대담한 가설이 등장하기 전까지 임시적으로만 우리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을 뿐이다. 포퍼가 보기에는 이것이 흄의 비판에서 경험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모든 금속은 전기를 통한다’는 보편적 과학명제는 전기를 통하지 않는 금속을 하나라도 발견하면 반증(거짓으로 판명)될 수 있지만 전기를 통하는 금속을 아무리 많이 모아도 결코 참으로 확증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을 통해 포퍼는 노이라트로부터 빈모임에 대한 ‘공식적 반대자’라는 영예로운(?) 칭호도 얻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던 포퍼는 1935년 후일 <과학적 발견의 논리>로 영미권에 알려질 역작 <연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를 출판했고 이 책은 포퍼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큰 반향을 불러왔다. 그 뒤 포퍼는 나치즘의 등장으로 오스트리아를 떠나 1937년에 뉴질랜드의 캔터베리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이후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그의 강한 옹호가 점차 알져지면서 1946년 런던대학교의 ’논리학과 과학적 방법‘ 교수로 부임한다. 이 시기 이후 1994년 임종 때까지 포퍼는 정력적으로 저술과 강연활동을 수행했다. 포퍼는 자만심이 무척 강했고 그를 알던 대부분의 사람에게 인간적으로 호감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여기에는 포퍼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견해에 대해 매우 직설적으로 폭언을 퍼부었고, 그 반면 자신에 대한 반대는 참아내질 못했다는 점도 한몫 한다. 나이가 들면서 포퍼는 대중강연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질문이 나오면 귀가 먹어서 못들은 척하기도 했다. 자유로운 토론과 합리적 비판을 강조했던 철학자로서는 다소 역설적 모습이다.
60년대 토머스 쿤과 철학논쟁
포퍼에 따르면 전체주의는 사회가 개인의 합 이상이라는 전일론적 생각을 바탕으로 미래의 정치적 발전양상에 대한 ’과학적‘ 예측이 가능하고 그 예측에 기초해서 미래사회 도래의 ’산고‘를 덜어줄 정책을 시행하자는 생각이다. 이는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꼼꼼히 연구하면, 자연과학의 법칙에 버금가는 역사적 일반화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역사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러나 포퍼는 전일론과 역사주의가 미래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너무나 많고 맥락에 따라 다양한 조합이 가능해서 실제로는 대강의 예측조차 가능하지 않음을 간과했다고 비판한다. 미래는 오히려 개인의 자발적 결정이 복잡하게 결집되어 이룩되는 것이고, 이 과정은 마치 과학자가 여러 가설을 경험적 증거에 빗대어 시험해보고 지속적으로 대안을 추구하듯이 여러 사회제도를 조심스럽게 시험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포퍼에게 이런 ’열린 사회‘는 과학자들이 반증주의에 입각하여 과학활동을 수행하는 상황과 정확히 동일한 원칙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다. 포퍼의 비판은 옛소련의 계획경제가 몰락한 지금에는 더 큰 호소력을 가지지만, 중국의 최근 성공을 볼 때 구체적인 목표를 가진 거시경제적 정책이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포퍼의 주장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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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욱/ 한양대 교수·철학 dappled@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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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퍼의 철학은 60년대 이후 토마스 쿤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두 사람은 과학에 대한 견해도 무척 달랐지만 담배에 대한 태도도 못지않게 달랐다. 담배 피우는 사람과 같은 방에 있었던 사람과는 말도 나누지 않겠다고 공언한 포퍼는 계속 줄담배를 피워대는 쿤과 도대체 논쟁을 이어나갈 수 없었고, 이는 지금도 철학적 논쟁의 우열을 가리는 흥미로운 방식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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