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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14 23:06 수정 : 2005.07.14 23:17

아름다워지고 싶은 염원 풀었더니 자연미·내면의 아름다움 운운 성형에 대한 불쾌감이 넘친다 모든 난치병이 치료 가능해질 때 줄기세포로 인한 불안감은 또 다른 불쾌감을 부를 수 있다 외모도, 치료도 결국 돈의 문제다

양식광어와 자연산 도다리를 구별하는 건 그래도 이해가 간다. 양식 광어는 성장 촉진제나 항생제가 섞인 사료를 먹고 자란다. 사람이 그거 안 먹고 웰빙하겠다는 거 납득이 가고 남는다. 그런데 성형미인과 자연미인을 구별하고, 성형미인에 대해 박대를 하는 건 왜 그런지 이해가 잘 안된다. 우리가 미인을 보고 얻는 즐거움은 단지 피사체의 양감에 근거한다. 애초에 미인이라는 현상자체도 지극히 우연적인 이목구비의 조합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신체 기능의 우열과 관련된 아무런 필연성도 없다. 사실 성형미인이 자연미인과 미적 품질이 같다면 배척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습관적으로 성형미인을 배척한다. 내면의 아름다움과 자연미를 내세우면서.

글쎄? 내면의 아름다움과 외모가 무슨 관계가 있지? 내 경험으로 내면과 외모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성형을 한다고 내면이 아름다워지거나 황폐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정도는 누구나 다 안다. 그런데 성형은 흔히 내면의 부박함에 대한 물증처럼 간주된다. ‘아름다운 얼굴을 갖고 싶은 욕구=내면의 결핍’이라는 등식은 근거가 약하다. 그런데도 이게 의심 없이 수긍되는 것은 어떤 감정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는 것 아닐까? 성형한 사람에 대해 성형 안 한 혹은 못한 사람이 갖는 까닭모를 불쾌감 말이다.

이 불쾌감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정자와 난자의 만남은 신만이 풀 수 있는 고차원 방정식으로 믿고 외모에 순응해온 오랜 관습이 파기되는데 대한 막연한 불안감? 태어나면서 결정된 줄 알았던 외모도 살면서 남들과 경쟁해야 하는 품목이 됐다는 고단함에 대한 예감? 외모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그들’의 희망이 ‘이쪽’에 던져주는 상대적 절망감? 나는 그 불쾌감 속에는 이 모든 징후들이 다 녹아 있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외모가 결국은 돈의 문제라는 생각이 이 불쾌감의 뇌관인 것 같다.

성형은 기본적으로 비싸고 자연미인 행세를 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 미는 어차피 배타적 지위를 열망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성형의 흔적을 없애는 데 몰두할 것이고, 자연미의 고지는 돈다발로 계단을 쌓아야 한다. 불쾌감이 결정적으로 증폭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누구나 염원하는 고지, 하지만 소수밖에 갈수 없는 고지, 그 고지에 가는 유일한 방법이 돈이라니! 정당성을 검증할 길 없는 돈이라니!

사실 성형 기술의 발달 그 자체는 인간의 이성과 과학에 의한 역사발전을 믿는다면 축복해야 할 일이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인간의 염원 한 가지를 인간의 손으로 해결했으니 얼마나 기특한 일인가. 그럼에도 성형에 대한 막연한 불쾌감이 존재한다는 것, 그건 그 혜택이 동의할 수 없는 소수에 국한될 수 있다는 의심 때문이다. 그러니 성형에 대한 불쾌감이 ‘내면의 아름다움’이나 ‘자연미’ 운운으로 엉뚱하게 표출되는 건 딱한 일이다. 자연미는 귀족의 미학으로 역사적 현상인 세습 신분을 마치 자연적 현상인 것처럼 자연화 하려는 정치적 욕망과 결부돼 있다. ‘자연의 미’ 혹은 ‘자연스런 미’ 가 지시하는 대상이 어디 있는가? ‘자연’은 실재하는 것 같지만 실재하지 않는, 평가자에게 가장 익숙한 양태를 지시할 뿐이며, 그 양태는 빡빡함에 대해서는 느슨함, 단속 보다는 연속, 빠름 보다는 느림, 전진보다는 회귀, 직선보다는 곡선과 친화적이다. 그건 먹고 살기 바쁜 평민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귀족의 생활습성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성형한 얼굴에 대고 ‘진정한 미는 자연미’라고 말하는 것은 ‘성형의 표시가 나지 않을 때까지 줄기차게 수술하라’는 뜻이다. 진정으로 성형에 불쾌감을 느끼는 자라면 차라리 성형을 의료보험 적용대상에 넣어라고 말하는 게 낫다.

차원이 다르긴 하지만, 줄기세포 배양과 성형의 공통점은 인간이 신의 영역을 접수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직 줄기세포에 대해서는 사회적 불쾌감이 없다. 대신 불안감이 있다. 성형도 초기에는 불안감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다 시술이 일반화되면서 불안감은 불쾌감으로 바뀌었다. 성형 기술의 수준에 대한 의심은 이내 기술의 수혜자가 아님에 대한 불만으로 돌변했다. 줄기세포가 난치병 치료에 적용돼서 실질적 성과를 거둔다면 현재의 불안감은 어떻게 변할까? 나는 줄기세포를 생명이라고 치료를 거부하는 루 게릭 병 환자를 상상하지 못한다. 또 죽어가는 루 게릭 병 환자를 앞에 두고 줄기세포 치료를 끝까지 반대하는 인간도 상상할 수 없다. 그 어떤 인간도 생명이라는 관념과 자신의 생명을 교환할 의사는 없다. 전쟁에서 죽어나간 사람의 수를 상상하면 난치병 치료로 죽어가는(?) 줄기세포에 대해 생명의 존엄성을 대입하는 건 코미디다.

남재일/ 문화평론가
그 생명의 존엄성, 생명이라는 관념에 대한 물신은 조금이라도 악역을 맡지 않겠다는 잔머리와 줄기세포가 외계인으로 돌변해 위협할지도 모를 내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신경증적 불안이 나란히 하느님 바짓가랭이를 잡고 징징댈 때 나올 수 있는 태도가 아닐까? 줄기세포 배양기술이 실질적인 난치병 치료로 이어지는 그 순간이 오면 아마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진정성은 줄기세포를 심을 돈이 없는 난치병 환자를 대하는 태도로 진짜 시험받게 되지 않을까?

과학 기술이 진보의 재앙이 되느냐 축복이 되느냐는 기술의 수준이 아니라 수혜의 양상에 달려 있다. 진짜 문제삼아야 할 것은 줄기세포가 야기할지도 모를 예측 불가능한 혼돈이 아니라 황우석 박사에게 쏟아지는 뭉칫돈들이 보여줄 예외 없는 자본의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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