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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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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골뱅이’로 부르는 것만 봐도 한국인에게 먹는다는 것은 각별히 중요하다 공적 · 사적 모임들은 거의 식사를 수반하고 거기서 중요정보가 유통된다 음식점에선 손맛의 정통성을 둘러싸고 종종 경쟁이 벌어진다
생활속의 문화사회학 한국말에서 ‘먹다’는 동사의 의미는 엄청나게 다양하다. 그 목적어로 들어올 수 있는 명사들을 나열해보자. 음식 이외에 많은 것이 먹는 대상으로 대입된다. 나이, 욕, 마음, 뇌물, 감동, 챔피언, 우승, 골 (goal), 화장, (도화지에) 물감.... 그 외에도 ‘시간을 잡아먹다’, ‘말이 잘 먹힌다’, ‘잊어 먹다’, ‘좀먹다’, ‘물 먹었다’ 등의 용례가 있고, ‘여자를 따먹다’는 ‘빌어먹을’ 표현도 있다. 이쯤 되면 ‘먹다’에 상응하는 외국어는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사물을 식사 행위 빗대어서 ‘시계에 밥을 준다’느니 ‘라디오에 약이 떨어졌다’느니 한다. 무엇보다도 압권은 @를 ‘골뱅이’로 부르는 것이다. 하고 많은 사물 가운데 먹을 것을 떠올려 이름붙이는 상상력은 기발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까. 한국인에게 먹는다는 것은 각별히 중요한가 보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은 ‘식사 했느냐?’는 인사에 익숙해지기까지 꽤 시간이 걸린다. ‘**가든’이 음식점을 뜻하는 콩글리쉬도 재미있고 냉면이나 고기를 가위로 자르는 것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곳곳에 지천으로 널려 있으면서도 계속 늘어나는 식당, 그 난삽한 간판들은 한국인도 적응하기 어려운 경관이다. 대도시에서 지방 소도시 그리고 깊은 산속 유원지에 이르기까지 식당들이 빼곡하다. 그것도 모자라 점심시간이면 배달 오토바이들이 곳곳을 누빈다. 그뿐인가. 노점상은 그 자체로 거대한 경제권을 이루는데 그 대부분이 음식을 취급한다. 지난 몇 년 경제난 속에 자영업의 비중이 급격히 커졌는데 (경제활동인구의 37% 정도로 세계 최고다), 그것 역시 내막을 보면 식당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자본력이나 기술 그리고 물품 조달이나 고객 확보 등에서 진입 장벽이 아주 낮다고 여겨지면서 너도 나도 뛰어든 결과다. 다른 한편 수요의 차원은 어떤가. 한국인들은 외식을 많이 한다. 공적 모임과 사적인 만남 그리고 ‘반(半)공식적인’ 회합의 자리들이 사람들의 일상을 가득 채운다. 거의 다 식사를 수반한다. 뒷풀이는 단순한 여흥이나 사교의 자리 이상의 의미와 기능을 갖는다. 거기에서 중요한 정보가 유통되고 연(緣)이 맺어진다. 그런 모임이 아니라도 한국인들은 바깥에서 식사를 많이 한다. 거기에는 음식문화도 관련이 되는데, 집에서 한 끼 식사를 제대로 챙겨 먹고 설거지까지 마치는데 들어가는 품이 그 어느 나라보다도 많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건수를 잡아 사람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고 (한국인들은 혼자서 식당에 들어가는 것을 매우 어색해 한다), 밤늦게 귀가한다. 평일에 식사 한 끼 제대로 함께 하지 못했던 가족들이 모처럼 보내는 주말 프로그램으로 또 다시 외식 자리가 마련되기도 한다. 이렇듯 방대한 수요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면 확실히 공급 과잉이다. 야무진 꿈을 가지고 창업을 했다가 몇 달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는 식당이 얼마나 많은가. 이제 음식점은 결코 만만하게 덤벼들 수 있는 업종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경쟁력의 요체는 무엇일까? 두말 할 것 없이 ‘맛’이다. 이 점에서 한국의 음식은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강한 편이다. 의식주 가운데 옷과 주거는 거의 서구화되었지만 음식만큼은 아직 건재하지 않은가.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 여행의 즐거움으로 손꼽는 것에서 음식은 빠지지 않는다. 그 맛은 고도의 수련을 거친 일류 요리사에게서도 나오지만 나이 드신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에게서도 나온다. 허름한 음식점에 손님이 장사진을 이루고, 그러한 손맛의 정통성을 둘러싸고 ‘원조’니 ‘진짜 원조’니 하는 경쟁이 종종 벌어진다. 그러나 음식점은 맛으로만 승부하지 않는다. 홍콩 구룡반도의 어느 레스토랑에는 음식 맛이 그다지 탁월한 것이 아닌데도 손님들이 북적댄다고 한다. 그 비결은 엉뚱하게도 메뉴판에 있다. 거기에는 매우 흥미진진한 연재만화가 매주 실리는데, 그 식당에서만 볼 수 있는 그 이야기에 빠져든 고객들은 일주일에 한번 씩 찾아오게 된다.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서울 종로 2가에 있는 어느 중국 음식점에서 일하는 한 배달원은 음식과 함께 시 한 편을 함께 서비스하는 것으로 한때 유명했다. 단골들은 오늘은 무슨 시를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음식을 주문했고, 그 배달부는 주인보다도 인기가 있었다. 식당은 단순히 음식만 파는 곳이 아니다. 식사의 즐거움은 단순히 미각의 차원만이 아니라 청각, 후각, 시각 등 총체적인 감각이 함께 어우러진다. 그런데 우리는 외식에서 그 즐거움을 누리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식사를 둘러싼 환경이 조악해서다. 음식을 치워갈 때 그릇들을 마구잡이로 포개 가져가는 모습, 음식을 상 위에 내려놓을 때 탕탕 내부치는 소리, 주방에서 설거지하면서 그릇들을 부딪치는 굉음, 화장실 냄새와 음식 쓰레기 악취, 주방 옆의 대걸레. 식탁 위의 두루마리 화장지…. 이 모든 것이 밥맛을 뚝 떨어지게 만든다.존폐 위기에 서 있는 영업 상황, 그리고 거기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의 생존 조건을 생각하면 그러한 열악함도 납득이 간다. 퇴직금에 빚까지 얻어 겨우 차린 가게가 위태로워 밤잠을 설치는 주인, 실직한 남편을 대신 벌이에 나섰거나 연변에 가족을 두고 이역만리에서 고달픈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아주머니들에게서 품위 있는 서비스를 기대하는 것이 사치일지 모른다. 그러나 피곤하고 우울한 기분으로 즐거운 식사를 제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손님에게 정성으로 대접할 때 솟아오르는 기쁨, 그것은 식당이 생산하는 부가가치의 원천이다. 고단할수록 경쾌한 마음으로 우러내는 맛깔, 그것을 담아내는 음식점은 삶의 원기를 북돋아주는 건강 충전소로서 손님들을 불러 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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