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21 19:15
수정 : 2005.07.21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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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도(非常道)
위스춘(余世存) 지음. 베이징 사회과학문헌출판사. 2005년(290쪽, 28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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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 · 현대사속 인물들 일화와 명언 꼼꼼히 모아
지식 파편마다 흔들리는 적잖은 지식인 모습 반영
바깥세상 책읽기
1942년 10월19일 중국공산당의 ‘근거지’가 있던 옌안에서 루쉰 서거 6주년 기념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작가 쑤쥔의 발언이 많은 공산당 작가들의 불만을 샀다. 저우양, 딩링, 류바이위 등 객석에 있던 작가들과 단상에 선 쑤쥔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깊은 밤까지 이어졌다. 논쟁이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사회를 맡은 우위장이 일어나 발언했다. “쑤쥔 동지는 우리 공산당의 좋은 벗이다. 우리의 방식이나 방법이 어딘가 잘못됐기 때문에 쑤쥔 동지가 이렇게 화가 났을 것이다. 우리의 단결을 위해 우리의 잘못을 먼저 검토해보자.” 이 말에 태도가 누그러진 쑤쥔은 이렇게 말했다. “우 선생의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내가 99% 잘못했다고 치자. 당신들은 1%의 잘못도 없는가? 생각해보라.” 딩링이 즉각 반박했다. “1%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가. 우린 조금도 잘못이 없다. 100% 모두 당신 잘못이다. 하늘 아래 널린 게 공산당의 벗이다. 당신 같은 ‘벗’은 ‘아홉 마리의 소 가운데 터럭 하나’(九牛一毛)에 지나지 않는다. 있으나 없으나 아무 상관 없다!” 쑤쥔은 다시 화가 폭발했다. “공산당의 ‘벗’이 하늘 아래 널려 있다니, 나 이 ‘터럭 하나’는 더 이상 ‘소’에 붙어 있길 원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우린, 빌어먹을, 갈라서자.” 이 말을 마친 뒤 쑤쥔은 옷깃을 털고 일어나 가버렸다.
최근 베이징 서점가의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고 있는 위스춘의 <비상도>에 실려 있는 일화다. ‘1840~1999년의 중국 이야기’란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청나라 말기부터 지난 세기 말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일화와 명언을 모은 일종의 만물상 잡지다. 자유 기고가인 지은이는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쩡궈판, 북양대신 리훙장, 신해혁명과 5·4운동기의 쑨원, 천두슈, 후스,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 등 역사에 굵은 선을 남긴 인물들 외에도, 일반인이 잘 몰랐던 문인·지식인들의 일화와 발언을 꼼꼼하게 모으고 이것들을 역사, 정치, 문예, 혁명, 의지, 기상, 신념, 자각, 운명, 허영, 염치 등 31가지 주제로 나눠, 160년 중국 근·현대사의 숨은 면모를 새롭게 드러내준다. 이런 편찬방식은 중국 남·북조 시기 송나라 유의경(403~444)이 펴낸 <세설신어>를 연상시킨다. 지은이가 자신의 시각에서 역사를 정리해 독자에게 뭘 일깨워주려 하는 대신, 옛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독자에게 역사의 단면을 직접 곱씹어볼 기회를 주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이런 유형의 책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은 두꺼운 경전을 독파하는 고통 없이도 역대 기인·지식인들의 빛나는 예지를 손쉽게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민국 시기의 지식인 왕야난은 이렇게 말했다. “전제 제도 아래엔 다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벙어리고 다른 하나는 사기꾼이다. 내가 볼 때 오늘날 중국은 소수의 사기꾼이 다수의 벙어리를 통치하고 있다.”
그러나 지은이가 그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수집가인 건 아니다. 지은이는 중국 근·현대사의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유인해(類人孩)’의 상태에 머물러있다는 뼈저린 깨달음이 이 책을 펴내도록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유인해’란 ‘어린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으나 아직 어른에 이르지 못한 인종’이란 뜻으로, ‘원숭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으나 아직 인류에 이르지 못한 인종’인 ‘유인원’에 빗대어 지은이가 지어낸 말이다. ‘유인해’란 “영원히 학습 중이고, 영원히 독립된 생활을 준비하는 중이며… 매번 새로 알게 된 사실을 모두 진리 혹은 최종의 신앙으로 간주하는” 인종이다. 이들은 올해는 루쉰을 외치다, 내년엔 사르트르를 부르짖고, 내후년엔 푸코를 읽으라고 소리친다. 유인해의 가장 큰 특징은 지식의 파편 하나에 이리저리 좌우된다는 점이다.
지은이의 편찬 의도는 ‘비상한 발언’(非常道) 가운데서 ‘유인해’의 소아병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해보려는 데 있다. 이 책이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까닭이 여기 있다. 가령 이 책의 다음과 같은 일화는 중국 현실에 대한 말없는 비판으로 읽히기도 한다.
연안 시기 황옌페이가 마오쩌둥에게 물었다. “‘일어날 땐 왕성하지만 망할 땐 한 순간’이란 말이 있다. 중국공산당은 어떻게 이 ‘주기율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마오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이미 새로운 길을 찾았다. 우리는 이 주기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새로운 길이란 ‘민주’다. 인민으로 하여금 정부를 감독하도록 하면 정부는 감히 해이해질 수 없다. 사람들마다 책임지도록 함으로써 우리는 사람이 죽고 정치가 제 구실을 못 하는 파탄을 막을 수 있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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