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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시집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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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어둠속으로 사라진 화사한 ‘꽃뱀의 시간’ 그 진상의 틈 메우기엔 ‘말의 블랙홀’ 너무도 넓다 “마주친 순간에는 꽃잎이던 허기진 낙화의 심사이여!” 삶과 죽음 다르지 않구나
김명인(59)씨의 여덟 번째 시집 <파문>(문학과지성사)은 개화와 낙화, 삶과 죽음의 길항 속 공존을 노래한다. 김명인씨의 시들에서 꽃의 피어남과 시듦, 목숨의 지속과 중단은 서로 맞서는 가운데 한 줄로 꿰인다. 겉보기에 대립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통합된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뫼비우스의 띠를 닮았다. 더 중요한 것은 대립이 곧 통합일 뿐만 아니라, 대립함으로써 비로소 통합이 가능해진다는 변증법적 인식이라 할 수 있다. 피어남과 시듦은 대립이자 통합 시집 첫머리에 놓인 시 <꽃뱀>은 가히 대립되는 심상들의 진열장과도 같다. “절벽 위 돌무더기가 만든 작은 틈새/스치듯 꽃뱀 한 마리 지나갔다”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꽃뱀이 스쳐 간 검은 틈과 꽃뱀의 화사한 피부는 대립적 심상들의 출발점에 해당한다. 그로부터 석 줄 뒤의 “바닥 없는 적요 속으로 피어올랐던 꽃뱀의 시간이/눈앞에서 순식간에 제 사족을 지워버렸다”에서는 ‘피어올랐던 꽃뱀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워져버렸다’는 대립적 사태가 제시된다. 이 구절은 다시 몇 줄 뒤 “마주친 순간에는 꽃잎이던/허기진 낙화의 심상이여!”로 되풀이되는데, 이것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그 사이에 새로운 의미망을 덧붙인, 발전 속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의미망이란 무엇인가. 앞의 두 인용구 사이에 있는 몇 줄을 살펴 보자. “아직도 한순간을 지탱하는 잔상이라면/연필 한 자루로 이어놓으려던 파문 빨리 거둬들이자/잘린 무늬들 그 허술한 기억 속에는/아무리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말의 블랙홀이 있다” 여기에서는 ‘기억’과 ‘말의 블랙홀’이 대립하고 있거니와, 그 둘의 대립-관계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잔상’ 또는 ‘파문’이다. 기억은 잔상이나 파문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인데, 그것을 연필로써 온전히 복원하기에는 그 사이에 놓인 블랙홀이 너무도 넓고 크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블랙홀’이 다시 첫 줄의 ‘틈새’로 연결되는 것에 주목해 보자. 그리고, “마주친 순간에는 꽃잎이던/허기진 낙화의 심상이여!”를 다시 읽어보자. 꽃뱀은 꽃잎에, 틈새와 블랙홀은 낙화에 이어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심상이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의 블랙홀’과 ‘낙화의 심상’은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 시인은 이것들이 다름 아닌 말과 심상에 관계된 표현임을 거의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좀 덜 친절했다면 ‘말의 블랙홀’ 대신 그냥 ‘블랙홀’로, ‘낙화의 심상’ 대신 그냥 ‘낙화’로 처리하고 넘어갔을 게다. 그러나 마음이 약한 그는 독자 쪽에서 겪을 독해의 어려움을 헤아렸던 것이리라.요컨대 이 시는 시작(詩作)의 메커니즘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시집의 맨앞에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통상 시집의 첫 시는 해당 시집 전체의 서시로 기능하는 수가 많다. 시집 전체의 기조를 요약하거나, 시인 자신의 시작 태도를 담기도 한다. 그렇게 볼 때, 어두운 틈새를 스치듯 지나간 꽃뱀이란 잘만 하면 근사한 시의 원재료가 될 수도 있을 심상을 상징한다. 그 꽃뱀의 무늬, 즉 파문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성질의 것이어서 좀처럼 확고히 포착하기가 어려운 물건이다. 시인의 고민은 여기서 비롯된다. 시의 나머지 부분을 마저 읽어 보자. “꽃뱀 스쳐간 절벽 위 캄캄한 구멍은/하늘의 별자리처럼 아뜩해서/내려가도 내려가도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끝내 지워버리지 못하는 두려운 시간만이/허물처럼 뿌옇게 비껴 있다” 꽃뱀에 가 닿으려는 시인의 노력은 아득한 구멍의 깊이 때문에 쉽사리 성공에 이르지 못한다. ‘두려운 시간’이란 그가 시를 붙들고 끙끙대고 있는 현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 확보된 것은 뿌연 허물뿐. 시작(詩作)은 결코 쉽지 않을 모양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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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시집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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