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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21 20:08 수정 : 2005.07.21 20:14

김명인 시집 파문

아득한 어둠속으로 사라진 화사한 ‘꽃뱀의 시간’ 그 진상의 틈 메우기엔 ‘말의 블랙홀’ 너무도 넓다 “마주친 순간에는 꽃잎이던 허기진 낙화의 심사이여!” 삶과 죽음 다르지 않구나

 김명인(59)씨의 여덟 번째 시집 <파문>(문학과지성사)은 개화와 낙화, 삶과 죽음의 길항 속 공존을 노래한다. 김명인씨의 시들에서 꽃의 피어남과 시듦, 목숨의 지속과 중단은 서로 맞서는 가운데 한 줄로 꿰인다. 겉보기에 대립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통합된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뫼비우스의 띠를 닮았다. 더 중요한 것은 대립이 곧 통합일 뿐만 아니라, 대립함으로써 비로소 통합이 가능해진다는 변증법적 인식이라 할 수 있다.

피어남과 시듦은 대립이자 통합

시집 첫머리에 놓인 시 <꽃뱀>은 가히 대립되는 심상들의 진열장과도 같다. “절벽 위 돌무더기가 만든 작은 틈새/스치듯 꽃뱀 한 마리 지나갔다”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꽃뱀이 스쳐 간 검은 틈과 꽃뱀의 화사한 피부는 대립적 심상들의 출발점에 해당한다. 그로부터 석 줄 뒤의 “바닥 없는 적요 속으로 피어올랐던 꽃뱀의 시간이/눈앞에서 순식간에 제 사족을 지워버렸다”에서는 ‘피어올랐던 꽃뱀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워져버렸다’는 대립적 사태가 제시된다. 이 구절은 다시 몇 줄 뒤 “마주친 순간에는 꽃잎이던/허기진 낙화의 심상이여!”로 되풀이되는데, 이것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그 사이에 새로운 의미망을 덧붙인, 발전 속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의미망이란 무엇인가. 앞의 두 인용구 사이에 있는 몇 줄을 살펴 보자.

 “아직도 한순간을 지탱하는 잔상이라면/연필 한 자루로 이어놓으려던 파문 빨리 거둬들이자/잘린 무늬들 그 허술한 기억 속에는/아무리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말의 블랙홀이 있다”

여기에서는 ‘기억’과 ‘말의 블랙홀’이 대립하고 있거니와, 그 둘의 대립-관계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잔상’ 또는 ‘파문’이다. 기억은 잔상이나 파문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인데, 그것을 연필로써 온전히 복원하기에는 그 사이에 놓인 블랙홀이 너무도 넓고 크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블랙홀’이 다시 첫 줄의 ‘틈새’로 연결되는 것에 주목해 보자. 그리고, “마주친 순간에는 꽃잎이던/허기진 낙화의 심상이여!”를 다시 읽어보자. 꽃뱀은 꽃잎에, 틈새와 블랙홀은 낙화에 이어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심상이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의 블랙홀’과 ‘낙화의 심상’은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 시인은 이것들이 다름 아닌 말과 심상에 관계된 표현임을 거의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좀 덜 친절했다면 ‘말의 블랙홀’ 대신 그냥 ‘블랙홀’로, ‘낙화의 심상’ 대신 그냥 ‘낙화’로 처리하고 넘어갔을 게다. 그러나 마음이 약한 그는 독자 쪽에서 겪을 독해의 어려움을 헤아렸던 것이리라.


요컨대 이 시는 시작(詩作)의 메커니즘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시집의 맨앞에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통상 시집의 첫 시는 해당 시집 전체의 서시로 기능하는 수가 많다. 시집 전체의 기조를 요약하거나, 시인 자신의 시작 태도를 담기도 한다. 그렇게 볼 때, 어두운 틈새를 스치듯 지나간 꽃뱀이란 잘만 하면 근사한 시의 원재료가 될 수도 있을 심상을 상징한다. 그 꽃뱀의 무늬, 즉 파문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성질의 것이어서 좀처럼 확고히 포착하기가 어려운 물건이다. 시인의 고민은 여기서 비롯된다. 시의 나머지 부분을 마저 읽어 보자.

 “꽃뱀 스쳐간 절벽 위 캄캄한 구멍은/하늘의 별자리처럼 아뜩해서/내려가도 내려가도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끝내 지워버리지 못하는 두려운 시간만이/허물처럼 뿌옇게 비껴 있다”

꽃뱀에 가 닿으려는 시인의 노력은 아득한 구멍의 깊이 때문에 쉽사리 성공에 이르지 못한다. ‘두려운 시간’이란 그가 시를 붙들고 끙끙대고 있는 현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 확보된 것은 뿌연 허물뿐. 시작(詩作)은 결코 쉽지 않을 모양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김명인 시집 파문
죽음을 끌어안은 생명 예찬

<꽃을 위한 노트>라는 작품은 <꽃뱀>과 겹치는 심상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김춘수의, 역시 시작 메커니즘을 다룬 <꽃을 위한 서시>를 연상시키는 이 시는 그러나 시에 관한 시, 즉 메타시라기보다는 삶과 죽음을 한목에 파악하려는 의지를 노래한 작품으로 읽힌다. “각혈 선명한 저 절정들!”이나 “절정을 모르는 꽃 시듦도 없지” 또는 “활짝 핀 꽃이여, 등 뒤에서 나를 떠밀어다오/꽃대의 수직 절벽에서/낙화의 시름 속으로!”라는 구절들에서 읽히는 것은 삶과 죽음이 한통속이라는 이치, 그리고 ‘내’가 그것을 몸으로 체득하고 싶다는 강력한 소망의 피력이다.

삶과 죽음의 변증법적 상관관계에 대해서라면 <봄꽃나무>라는 시가 맞춤하다. 시의 앞부분은 생명충동과 죽음충동 사이의 단순한 이항대립처럼 보인다.

 “촉새 혓바닥을 내밀 때 봄꽃나무는/그대로가 혀 짧은 지저귐이다/종종 치며 잔가지 사이를 내딛다 보면/밭은기침 소리 자옥하게 황사덫을 펴지만/세모래 질긴 사슬은 연두 초록/헐거움으로 끊어내는지/이튿날이면 분홍빛 다툼이 망울망울/커다란 화판을 부풀리고 있다”

황사덫의 밭은기침, 세모래 질긴 사슬을 물리치고 연두 초록 헐거움이 이겼다. 생명의 승리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하늘이 빌려주는 것이라면/큰 손 이내 거두어 가신다, 목숨처럼/꽃의 뒤끝은 해를 두고 갚아야 할 죗값”이라는 냉혹한 사실의 확인이 이어진다. 생명은 어디까지나 죽음에 저당잡힌 것, 결코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죽음 쪽의 역전승?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 데에 이 시의 묘미가 있다. 마지막 대목이다.

 “하지만 꽃나무는 해묵은 부채로도 새 열매/탐스럽게 키워낼 것이니/지금은 어떤 불멸보다도 해마다의 빚잔치 생광스러워/벌 나비 날갯짓으로/저 유곽 헤매고 다닐 때!”

불멸은 아니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죽음은 언젠가 오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생명을 찬미하고 구가할 때. 그것이 비록 ‘유곽’의 허랑방탕에 불과할지라도 지금은 그에 몸을 맡기고 함께 흘러갈 때!

결말부의 생명 예찬은 앞머리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이제는 적어도 죽음이라는 사실의 엄연함을 수납한 바탕 위에서의 생명 찬가인 것이다. 말하자면 죽음을 끌어안은 생명에 대한 수긍이다. 죽음에 대해 무지하거나 그것을 단순히 배척할 따름인 ‘순수’ 생명이 아닌, 죽음과 몸을 섞은 경험과 지혜의 생명. 이처럼 생명-죽음-(더 큰)생명으로 이어지는 변증법적 사생관이 시집 <파문>의 세계다.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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