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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21 20:39 수정 : 2005.07.21 20:54

폴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적’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과학자들은 각자가 해결하려는 문제에 적합한 방법을 그때그때 임시방편적으로 찾아 연구해야 한다는 방법론적 무정부주의를 주창했다.

자유분방한 삶과 급진적 주장 편 풍운아 빈 대학 때 비트겐슈타인과 포퍼 영향 받아 ‘어떤 것이든 좋다’는 방법론적 무정부주의 모든 이론 동등하다는 인식론적 상대주의로 발전 모든 수강생에 A 학점 줘 대학 당국과 마찰도

과학속 사상, 사상속 과학/ ⑩ 파이어아벤트의 과학철학과 정치철학

비교적 추상적인 주제에 대해 꼼꼼한 분석과 깊이 있는 이해를 추구하는 철학자 중에서 ‘풍운아’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한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폴 파이어아벤트는 그의 자유분방한 라이프스타일이나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기 좋아한 이력, 다채로운 예술가·연애인 기질 그리고 과학철학과 정치철학에 걸쳐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그의 급진적 견해로 인해 자타가 공인하는 요란스러운 삶을 살아왔다. 그의 ‘어떤 것[방법]이든 좋다’(Anything goes)라는 구호에서 짐작되듯, 그는 과학을 다른 지적 활동과 구분짓고 과학연구를 진리로 인도해주는 올바른 ‘과학적’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과학자들은 각자가 해결하려는 문제에 적합한 방법을 그때그때 임시방편적으로 찾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방법론적 무정부주의는 결국 현대사회에서 표준적인 지식으로 간주되는 서양과학이 민간요법이나 신화와 인식론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는 인식론적 무정부주의와 상대주의로 이어지게 된다.

철저한 사례연구 바탕 주장 펴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여럿 있었지만 특별히 파이어아벤트가 과학사상계 전반에 큰 파장을 몰고 온 이유는 그의 견해가 갈릴레오와 같은 과학의 영웅들이 실제로 어떻게 연구했기에 성공적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철저한 사례연구에 근거하여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파이어아벤트에 따르면 갈릴레오는 논리실증주의의 검증원리나 포퍼의 반증주의가 요구하는 엄격한 규칙을 따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규칙을 적절한 방식으로 ‘어겼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파이어아벤트의 기본 논점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설득적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체계적으로 발전해 온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에 대항하여 새로운 역학체계를 막 건설하던 갈릴레오로서는 설명할 수 있는 경험적 사실보다 설명할 수 없는 사실이 압도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논리 실증주의의 권고대로 어떤 과학이론이 더 잘, 더 많이 설명하는지를 판단한다면, 갈릴레오의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론과의 경쟁에서 패했어야 한다. 또한 포퍼의 권고를 따르더라도, 갈릴레오의 이론은 아직 한창 발전 중이어서 반증사례는 넘쳐났으므로 여전히 포기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갈릴레오의 역학은 뉴턴 등에 의해 성공적으로 발전되었고 지금에는 갈릴레오 이론을 그 당시 포기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처럼 과학이론의 발전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이론은 기존 이론에 비해 원천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기에 그 이론이 어느 정도 발전할 때까지는 간단하게 반증해버리기보다는 그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것이 필요하다. 파이어아벤트의 표현에 따르면, 이론의 발전을 이론선택의 합리성이라는 ‘구속복’으로 제한하면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게 된다.

그러나 이 지점까지 파이어아벤트의 논점은 단순히 하나의 과학방법론을 고집하지 말고 다양한 방법론을 적절히 사용하여 과학연구를 수행하라는 방법론적 다원주의로 볼 수 있다. 게다가 방법론적 다원주의는 포퍼의 반증주의를 발전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포퍼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믿고 있는 이론을 반증시키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지식이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한 이론을 반증하는 좋은 방법은 그 이론과 양립가능하지 않은 대안이론을 여럿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 ‘어떤 것이든 좋다’는, 역사적으로 보편적 타당성을 가진 유일한 방법론은 반증주의나 검증주의가 아니라 어떤 방법이든 성공적이기만 하면 무엇이든 사용하여 과학연구를 수행하라는 제안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물론 파이어아벤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경쟁하는 이론들 사이에서 중립적 판단을 내려줄 것으로 기대한 관찰문장이 제대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특정 이론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관찰의 이론적재성에 근거하여 경쟁하는 이론평가의 객관적 기준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로부터 파이어아벤트는 세계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을 인식론적으로 평가하고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인식론적 비관론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에는 세계에 대한 모든 지적 주장이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상대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2차대전 참전 한때 하반신 마비

이렇게 급진적인 파이어아벤트였지만 자신에 대한 비판에는 상처받기 일쑤였고, ‘귀가 얇아서’ 다른 철학자의 견해로부터 종종 깊은 영향을 받으며 포퍼를 충실히 따르는 철저한 반증주의자에서 적극적으로 상대주의를 옹호하는 급진적 사상가로 변모해갔다. 강의를 비롯한 교수로서의 의무를 싫어했고 언젠가는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모두 ‘에이’ 학점을 주어 학교당국과 마찰을 빚었던 파이어아벤트였지만 그의 강연에는 항상 청중이 몰려들었고 그는 늘 ‘볼거리를 제공하는’ 사람이었다. 파이어아벤트는 자신의 과학철학적 견해를 정치철학으로 확장시키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서양과학이 수용되는 방식이 독단적이라고 비난했으며 동양의 침술이나 인디언의 약초학처럼 다양한 대안적 ‘과학’에 동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견해는 그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교수생활을 하던 7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왔다.

파이어아벤트는 1924년,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로 어수선한 오스트리아 빈의 중산층 가정에 태어났다. 후일 철학자보다는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으로 알려지기를 원했던 파이어아벤트였지만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어린 시절에는 주로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던 병약한 아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곧 파이어아벤트 특유의 ‘끼’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배우 지망생이 되었고, 어느 날 헌책방에서 희곡과 소설을 묶음으로 사다가 그 안에 끼여들어 온 철학책을 읽고 철학의 매력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물리학과 천문학에 특출한 재능을 보인 예술가 지망생이었다. 파이어아벤트의 또 다른 재능은 성악에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목소리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성악레슨을 꽤 오랫동안 받았다. 파이어아벤트는 나이가 들어서도 노래 부르기에 대한 애착을 간직했는데 잘 훈련된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일로부터 얻는 즐거움이 지적 작업에서 얻는 즐거움을 압도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당시 파이어아벤트가 꿈꾸었던 이상적 삶은 오전에는 이론천문학 공부를 하다가 오후에는 성악연습을 그리고 저녁 때는 오페라 공연을 한 뒤 밤에 집에 돌아가서는 별자리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파이어아벤트는 2차 대전 중 징집되었고 혁혁한 무공을 세워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척추손상을 입고 한때 하반신이 마비되기도 했으며 평생을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척추손상은 파이어아벤트에게 평생 큰 고통을 주었는데, 파이어아벤트는 대안적 치료방법을 사용하여 큰 효과를 보았고 이는 대안과학에 대한 그의 신뢰를 강화했다. 파이어아벤트는 빈대학 재학 당시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철학자 두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 둘은 비트겐슈타인과 포퍼다. 파이어아벤트는 훗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 담긴 의미의 사용이론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과학용어의 의미가 맥락에 의해 주어진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이론용어와 관찰용어의 구별을 거부하고 다양한 이론적 전통 사이의 공약 불가능성을 주장하게 된다.

공동연구했던 칼 포퍼와 멀어져

이상욱/ 한양대 교수·철학 dappled@hanyang.ac.kr
1951년 박사를 마친 파이어아벤트는 원래 케임브리지로 가서 비트겐슈타인 밑에서 연구할 계획이었지만 비트겐슈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결국에는 런던정경대학에서 포퍼와 함께 연구를 하게 된다. 비록 제2의 선택이었지만 포퍼와의 연구기간은 생산적이었고 파이어아벤트는 포퍼의 반증주의를 세련화시키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미 그는 포퍼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 같다. 포퍼는 파이어아벤트가 자신 곁에 더 머물며 함께 연구하기를 원했고 장학금도 구해주었지만 이를 물리치고 빈으로 돌아간 것이 그 점을 시사한다. 그 뒤 두 사람은 각자의 회고록에서 상대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싫어하는 사이가 된다. 늘 자유롭기를 원했던 두 철학자의 관계에 적합한 결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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