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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21 20:52 수정 : 2006.01.18 17:27

국도 80번 옆에 있는 캔터키 주 동부의 한 탄광. 갱도를 파고 들어가서 캐내지 않고 다이나마이트로 산의 뚜껑을 폭파시켜서 석탄을 캐내기 때문에 환경을 파괴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10


도로에도 계급이 있다. ‘주간 고속도로’는 미국의 중추신경
미국사회는 이도로를 중심으로 재배치돼 출입구엔 판에 박힌 마을이 우후죽순 생겼다
이에비해 ‘카운티도로’로 가는 자전거여행은 기울어가는 마을, 성장의 이면을 달린다

오늘 드디어 버지니아 주를 넘어 캔터키 주에 들어왔다. 14일 만이다. 미국 여행을 독서에 비유한다면 미국 자전거 횡단 여행은 12장 149쪽짜리 책을 읽는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지능 못지 않게 체력이 요구된다. 눈이 아니라 온 몸으로 읽는다.

어드벤처 사이클링 어소시에이션이 제작한 이 ‘책’은 한 쪽마다 50㎞ 안팎의 트레일이 주변의 마을과 함께 표시돼 있다. 14일만에 17쪽을 읽어서 새로운 주로 들어왔으니 그렇게 빨리 읽는 편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지도 읽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신대방동에 살 때 그 때로서는 먼 동네인 봉천4동까지 아무 이유도 없이 걸어서 갔다 온 뒤 다녀온 길을 지도로 그려보곤 했다. 언어는 실재를 단순화한 것이다. 산이라고 하면 관악산에서부터 에버레스트까지 다 포함된다. 지도는 선과 색의 언어로 현실을 단순화한 것이다. 글보다 더 직접적이다. 마치 암실 확대기로 필름에 빛을 비추면 하얀 종이에 형상이 돋아나듯 지도를 보고 있으면 세상이 부각된다. 그렇게 상상하는 게 좋다. 등고선 간격이 짧으면 설악산의 공룡능선과 같은 험한 산세가 떠오르고 강을 표시한 파란 선이 곧게 뻗어있으면 삼각주를 만들며 유유히 흐르는 나일강이 연상된다. 대지는 평평할 것이다.

쓰임새가 다르면 지도도 달라진다. 자전거 지도에 표시되는 시설은 식료품 가게와 우체국, 캠프장, 모텔, 주유소, 식당, 자전거포, 화장실 그리고 도서관이다. 이 일곱 가지 시설만 있으면 바이크 라이더들은 행복하게 인생을 살 수 있다. 얼마나 소박한 삶인가. 그러나 불행히도 이 7가지 시설을 갖춘 동네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은 대인기피증에 걸린 것처럼 미국의 오지를 지나간다. 인구 1천 명이 넘는 마을은 매우 번화한 마을에 속한다. 버지니아 주 다마스커스도 인구 981명밖에 안 된다. 오늘 내가 지나온 버지니아 주 헤이시(Haysi)는 인구가 186명이다.

미국의 오래된 마을들은 대체로 64㎞ 간격으로 포진해 있다. 마차가 하루에 가는 거리마다 마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물론 자동차가 도입되면서 중간에 마을들이 생겨나 이 간격이 문란해졌다.


인구 1천명이면 변화한 마을

지도에는 빨간 선으로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이 표시돼 있다. 자전거로 이 선을 타고 가면서 미국을 읽는다. 관광지나 목적지들을 찾아다니는 자동차 여행의 경로를 점선이라고 하면 자전거여행은 실선이다. 창 밖으로 보는 게 아니라 경치의 일부가 된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비가 내리면 비에 젖는다. 그래서 주변에 명승지가 있다고 해서 굳이 들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책의 부록에 불과한 것이다.

지도에는 쪽마다 길 안내가 돼 있다. 다음은 여행 시작 13일째에 읽은 135 쪽 지도의 길 안내.

“CR603을 타고 13㎞. CR600으로 좌회전, 160m 지점에서 CR603으로 우회전. 4㎞ 가면 코너록. US58로 직진. SR91이 합류. 그렇게 1㎞ 가면 다마스커스. 계속 SR91로. US58이 갈라져 나감. 사우스 포크 홀스톤 강을 건넌다. 6㎞ CR722로 좌회전. 1㎞ 뒤 CR709에서 우회전. CR803으로 직진. CR803이 SR80으로 바뀜. I-81 다리 밑으로 가면 메도뷰. CR609와 SR80을 따라 좌회전. 린델 로드와 SR80으로 우회전”

빨간 선에서 벗어나지 않게 타고 가는 것은 쉽지 않다. 종종 길을 잃어버린다. 트레일에서 벗어나면 세상이 갑자기 혼미해진다. 지도가 그려지지 않은 세상은 혼돈이다. 사실 트레일로 표시되나 안되나 촌이기는 마찬가진데도 말이다. 트레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길을 잃어버린 지점까지 돌아가야 한다. 아무리 기운 넘치는 바이크 라이더도 이미 넘어온 고개를 다시 넘어가라고 하면 뒤로 나자빠질 것이다. 안 그래도 먼 길인데 같은 길을 두 번 타게 되면 심신이 지친다. 어차피 미국 구경하는 건데 좀더 많이 보고 느끼면 되는 것 아닌가 말은 쉽게 하지만 그렇게 태평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지도에 표시된 길을 따라가는 게 쉽지는 않다
길을 잃으면 갑자기 세상이 혼미해진다
기운이 넘치는 라이더도 막 넘어온 고개를
다시 넘어가라고 하면 뒤로 나자빠질 것이다

브레이크스 인터스테이트 공원에 있는 식당에서 살쾡이가 유리문턱에 앞발을 대고 안을 바라보고 있다. 이 살쾡이는 저녁마다 빵을 얻어먹으러 온다고 한다.
입이 벌어지고 더운 숨이 나온다

길을 잃지 않으려고 바짝 긴장할 뿐 아니라 트레일에 나오지 않는 지름길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은 사실 필요 이상으로 많이 돈다.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선은 6379㎞,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선은 3092㎞㎞밖에 안 된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를 잇는 미국의 첫 대륙횡단국도였던 링컨 하이웨이도 5422㎞였다. 트레일의 총연장은 어느 국경선이나 국도보다 더 긴 6700여㎞. 여기다 길을 못 찾아서 헤매는 거리를 더하면 7000㎞를 훌쩍 넘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 바이크 라이더들은 항상 왜 이 길을 가야 하는지 의문에 빠지고, 참고서라고 할 수 있는 주별 지도를 꺼내서 샛길을 연구한다. 그래도 큰 틀에서는 트레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이 왜 이 트레일을 가느냐면 단순히 1976년 미 건국 2백 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천여 명의 바이크 라이더들이 이 길을 지나갔기 때문이다. 당시 루트를 설계할 때의 기록을 보면 여성 라이더 한 사람이 그 일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그는 차를 타고 가면서 교통량과 도로 표면 등을 확인하면서 지도에 루트를 그렸다. 그게 역사가 됐고 물론 조금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트레일이 고착됐다.

버지니아 주와 캔터키 주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브레이크스 인터스테이트 주립공원(Breaks Interstate Park)을 통과하는데 드디어 처음으로 동진하는 라이더들을 만났다. 데니스와 게리 스튜어트 부부. 고교 교사 출신의 데니스는 켄터키 동부의 험한 산길을 피해 국도 80번으로 우회하라고 일러줬다. 그 역시 그 길로 돌아왔는데 노견도 넓고 경사도 완만해서 라이딩의 재미를 만끽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 여행을 시작하면서 홀수를 싫어하게 됐다. 미국 도로 번호 특히 국도이상의 도로를 보면 짝수는 동서, 홀수는 남북으로 달리는 길에 붙는다. 동에서 서로 횡단하는데 트레일 지도에는 홀수 번호의 도로들이 적지 않았다. 그것은 트레일이 남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도 80번처럼 짝수라고 해서 반드시 동서로 반듯이 간다는 뜻은 아니다. 상당히 남북으로 요동을 친 뒤 결국 동서로 가긴 간다.

그래도 귀가 솔깃했다. 이틀 동안 상상을 절하는 고개들을 넘어왔다. 버지니아 주 워싱턴 카운티에서 러셀(Russell) 카운티로 넘어가는 고갯길은 한국에서라면 아흔아홉 고개라고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아니 백팔 고개라고 명명하는 게 낫겠다. 오만 생각이 다 교차하기 때문이다. 6.4㎞의 오르막길. 입이 벌어지고 더운 숨이 나온다. 지그재그로 중첩된 산들에 빗금을 그으며 올라가면서 저 모퉁이만 돌면 고갯마루가 나오겠지 하지만 산들은 감히 내게 승부를 걸다니, 또 다른 오르막을 예비하고 있다.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내가 가는 앞에서 지금 오르막길을 새로 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가다 보면 도로 공사하는 음흉한 놈들을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6.4㎞를 오르는데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 그리고 잠시 내리막길이다가 다시 헤이시에서 브레이크스까지 험악한 오르막을 올라와 녹초가 된 상태에서 그 말을 들었으니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도로에는 계급이 있다. 인터스테이트(Interstate)라고, 주들을 연결하는 주간고속도로, 도로 번호 앞에 US가 붙어있는 국도, 그리고 SR이 붙어있는 주도, CR이 붙어있는 카운티 도로, 그리고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고 번호만 있는 도로. 주간고속도로는 자전거가 들어가지 못하는 자동차님들의 전용클럽이다. 1950년대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이 해안에서 저 해안까지 신호등 없는’ 수퍼하이웨이를 만들자는 계획으로 시작된 주간 고속도로 건설 공사는 1290억 달러가 투입된 미 최대의 역사. 미국뿐 아니라 세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맥도널드 햄버거나 홀리데이 인, 피자 헛, 캔터키 프라이드 치킨 등 세계적 프랜차이즈들이 탄생한 것은 바로 주간고속도로라는 중추신경을 통해 미국 전역에 진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

길을 잘못 알려준 라이더 “망할 X”

미국 사회는 주간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재배치됐다. 주간고속도로의 출입구 근처에는 어디에서나 판에 박힌 똑 같은 마을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주간고속도로가 지나가지 않는 오래된 마을들은 쇠하고 있는 중이다. 주간고속도로를 피해 주로 카운티 도로로 가는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은 건국 2백주년을 기념하기 생겨난 긍정적인 취지와는 달리 성장에 가려진 미국의 이면을 달린다.

홍은택/〈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hongdongzi@naver.com
국도 80번을 타고 우회하는 데 이틀이 걸렸다. 첫날은 데니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여행했고 다음날 그를 저주했다. ‘망할 x’이라는 욕까지 튀어나왔다. 그에게는 완만한 내리막길이었을 것이다. 내게는 끝도 없는 오르막길이다. 도중에 물 마실 곳도, 이글거리는 태양을 피할 그늘도 한 점 없는 사막 같은 국도 80번. 거의 기절 직전에 그냥 계곡물이라도 마셔야겠다고 하는 순간 주유소가 하나 나타났다.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고 하자 가게 주인 아줌마는 너무 기쁜 소식이라도 들은 듯이 다른 손님들에게 “이 사람이 여기 험한 것을 알게 됐대” 하고 소리쳤다. 지역 주민들인 손님들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험한 데 사는 게 무슨 자랑이라고. 드디어 나는 그 유명한 캔터키 동부에 들어온 것이다. / 홍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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