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22 17:42
수정 : 2005.07.24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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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폐기장 백지화를 주장하는 부안군민들과 이를 막는 경찰의 무력충돌이 계속 빚어지던 지난 2003년 11월 말 부안읍 수협광장에서 1만여명의 주민이 모여 100일 넘게 이어지는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부안/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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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지역주민들 생업 접고 183일간 탄핵반대 촛불시위,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결사 이루고 문화투쟁·주민투표초 자본과 권력이 구성한 공간을 전복시켰다
고길섶씨 ‘부안 끝나지 않은 노래’
한국의 2000년대 들머리는 촛불집회로 기억될 것이다. 미선·효순 추모 촛불시위(2002년)와 탄핵반대 촛불시위(2004년)는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한 시민의 열망을 표상한다. 그러나 ‘잊혀진 촛불집회’가 있다. 2003년 전북 부안 군민들이 180여일 동안 참여했던 반핵촛불집회다.
지역군민 7만여명의 대다수가 사실상 생업을 접고 ‘광장’에 나섰던 이 항쟁은 발생 1년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문화과학> 편집위원이자 자칭 ‘백수’이며 나고자란 부안에 무작정 귀향하자마자 이 역사적 현장을 맞이하게 된 고길섶은 말한다. ‘부안항쟁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당신들은 이를 기억하지 않았다’고.
<부안 끝나지 않은 노래>(도서출판 앨피)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 회로에 애당초 ‘입력’조차 되지 않았던 부안항쟁을 이야기한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대통령까지 나서 지역 이기주의의 상징으로 몰고, 진보언론조차 그 실상을 외면했던” 공간에서 지은이는 오히려 자유로운 인간들의 투쟁하는 공동체를 발견했다. 부안 바로 옆 동네인 고부의 100년전 동학농민전쟁처럼, 불과 한달음 거리에 있는 광주의 25년전
광주항쟁처럼, 부안은 21세기 한국 민중이 일궈낸 ‘해방구’(코뮌)였다는 게 그의 평가다. 책의 부제도 ‘코뮌놀이로 본 부안항쟁’이다.
2002년 부안군의 핵폐기장 유치 신청 이후 시작된 주민들의 투쟁은 “권력과 자본이 일방적으로 구성·배치해놓은 (부안이라는) 공간을 전복시켰다.” 부안 수협 앞 6차선 도로는 ‘반핵민주광장’으로 변했다. 183일 동안 계속된 촛불집회는 주민 각자가 자유롭게 발언하고 토론하는 ‘만민공동회’였다. 음정, 박자 상관않는 주민 노래패 ‘노랑고무신’이 탄생하고, 곳곳의 벽에 반핵 그림을 그리는 ‘막칠하세팀’도 등장했다. 청소년들은 이곳 저곳에 작은 걸개그림들을 내걸었다. 동네 ‘업소’의 밴드와 가수들까지 반핵 공연에 가담했다. 주민들 스스로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문화공연과 문화실험을 계속하는 가운데,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등교를 거부했고, 교사들은 시위현장에 나와 반핵현장수업을 진행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두들겨 가공할 소음을 만들어내는 ‘집단 난타’는 부안 주민들이 창조해낸 새로운 저항이자 놀이였다.
그 절정 가운데 하나는 지난해 1월 치러진 부안 주민투표였다. 부안 주민들의 ‘발의’로 시작된 주민투표 과정은 자치민주주의 그 자체였다. 주민들 스스로 투표관리위원회를 구성하고 주민 성금으로 투표예산을 확보했으며, 개표상황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한 이 선거에서 부안군민들은 총선과 지방선거를 뛰어넘는 70%대의 투표율을 보였다.
“자본의 지역착취 및 공간화에 맞서 좌파운동이 진지하게 지역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바탕을 둔 이 책은 “조용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조직하며 사회적 주체로 전면에 나서 싸운 대서사시의 기록”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바대로 순응하며 사는 사회적 동물”이었던 부안 주민들은 이제 “지역 사회를 새로운 사회로 만들어가는 대안적 주체”이자 “자본과 권력에 저항하는 역동적 힘을 갖는 문화생산자들이자 전복자”가 됐다.
전통적인 계급 투쟁의 방식을 넘어서려는 ‘신좌파’의 접근법에 따르면, 부안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여준 코뮌이다. 여성과 청소년이 전면에 등장했다. 각 개인들이 자발적 결사를 이뤘다. 문화투쟁이 정치투쟁을 이끌었다. 그 안에서 놀이와 해방의 에너지가 충만했다. 성공적인 주민 자치가 자본과 권력을 대체했다. 무엇보다 핵폐기장 설치 반대라는 ‘생명’의 가치가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한 지지로 옮겨 붙었다.
지은이는 “‘부안에서 배우자’라는 말도 생겨났지만 아직 실제적 내용성은 제시되지 못했고 담론화되는 공론의 장도 형성되지 못한 상태”라고 지적한다. <부안 끝나지 않은 노래>는 부안 항쟁을 신좌파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그 함의를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대안으로 연결시키려는 의미있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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