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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26 17:18 수정 : 2005.07.26 17:20

자주적 조선민중사 연구한 ‘일본의 양심’ 고길희 교수의 ‘하타다 다카시’ 평전

고길희 교수의 ‘하타다 다카시’ 평전

하타다 다카시, 혹은 기전외()라고 들어봤는가? 386 이전 세대쯤은 <조선사>(1951), <일본인의 조선관>(1969)으로 기억할지나 대부분은 모를 터이다.

그의 평전 <하타다 다카시>(지식산업사 펴냄)가 나왔다. 저자는 야마가타 국립대학 교육학부에 재직하는 고길희(41) 교수. 토박이 한국인이다. 한국인에게 하타다 다카시보다는 기전외로 기억되는 이 사람 (1908~1994년)의 평전을 한국인이 썼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만년에 자서전 집필을 거부한 것이 첫째 이유요,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 걸친 경계인임이 둘째 이유요, 한국인에게는 ‘일본의 양심’으로, 대부분 일본인한테는 ‘배신자’로 평가받는 현실이 셋째 이유다.

한·일 ‘경계인’ 의 삶

그의 원죄는 그가 일본인으로서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 1908년 식민지 조선 마산에서 의원집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마산소학교, 부산중학교를 졸업하고 구마모토 제5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도일하기까지 17년동안 조선에서 살았다.

그에게 조선은 가난하고 더러운 식민지인 동시에 아름답고 즐거운 청소년기를 보낸 정신적 고향인 셈이다. 도쿄제국대학에서 아시아 식민지배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한 동양사를 전공하고, 1940~44년 대륙침략의 중추였던 만철 조사부에서 일했으며 44년부터 베이징 북지개발회사에서 일본군에 협력하는 업무인 노동력 조사를 맡아 일했다. 40살 무렵까지는 식민자 2세로 특권을 누리며 ‘별 생각없이’ 일제의 조선·중국 지배에 이바지한 인물이었다.

그가 ‘재조일본인 2세’라는 원죄를 체감한 것은 패전 3년 뒤 귀국해 폐쇄적인 조국 일본과 맞닥뜨리면서다. 토종 일본인들에게 그는 이방인이었던 것. 그로부터 그는 어쩔 수 없는 반조선인·반일본인이었다. 의식에 내재된 향수와 제국의식의 갈등은 그의 눈을 전쟁에 휘말린 조선으로 향하게 했다. “조선인의 고뇌를 자신의 고뇌로 삼는 것이 조선사 연구의 기점”이라며 그는 <조선사>를 통해 동학농민전쟁, 조선시대 노예·농민의 신분변화를 둘러싼 투쟁 등 조선민중의 자주적이고 저항적인 역사를 기술하였다. 고대사, 연대기, 지명고증에 치우친 기존의 연구와, 한국전쟁 특수를 천우()라며 기뻐한 일본인들과 전혀 달랐다. <조선사>는 일종의 ‘청산해야 할 빚’ 갚기. 한국과 재일동포 연구자들에게 큰 충격과 감동을 주어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 같은 이는 서문을 읽고 “온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그는 1959년 조선사연구회를 만들어 조선사의 과학적 연구와 조선-일본의 친선을 위해 연구활동을 하고 재일동포 이진우 소년 감형운동, 김희로 구명운동에 발벗고 나섰으며 1960년대초 한일회담 반대운동에도 가담하는 등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변모했다.

한국에 대한 빚갚기는 계속돼 <원구()>(1965), <일본인의 조선관>(1969)을 펴냈다. 전자는 고려가 원나라의 일본침략 앞잡이라는 기존의 시각을 뒤집은 것으로 ‘고려인들은 전국이 초토화하도록 최후까지 항전하였으며 삼별초는 몽고의 일본침략을 저지한 용사’라는 해석이다.


‘일본인의 조선관’ 등 펴내

후자는 일본인의 뒤틀린 조선관의 뿌리를 되짚어 이를 시정하고자 한 것으로 일선동조론, 타율성론, 정체론 따위의 허구를 까발겼다. 한국에서 역사학자는 물론 사회과학자들의 관련 논문에 참고문헌으로 빠지지 않는 저작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에 또아리 튼 ‘어둡고 가난한 조선’의 이미지는 계속되었다. 이를 털어버린 계기는 1972년 북한방문에 이은 75년, 77년의 한국방문. 평양에서 전쟁의 폐허를 딛고 재건된 도시의 청결함과 의연함을 본 그는 마산을 방문해 자기가 살았던 집에서 사는 평범한 여성을 만나면서 비로소 구원에 이른다. 한국전쟁 때 남편을 잃고 혼자서 세 명의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낸 주부한테서 존경스러움을 느꼈다. 이로써 자기 안의 부정적인 조선인상을 씻어냈다.

지은이 고길희씨는 자신의 저서를 계기로 “이분법적 한-일관계에서 침묵을 강요당해온 경계인의 삶을 규명하는 연구가 활성화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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