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28 17:41
수정 : 2005.07.28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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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수원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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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읽었다/ 에밀리 브론티 <폭풍의 언덕>
열정은 맹목적입니다. 다 탈 때까지 타오르고, 함께 타오르기를 희구합니다. 타다가 남은 동강은 정말이지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상처고 체증입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다시 손에 든 책이 바로 <폭풍의 언덕>입니다. <폭풍의 언덕>은 타다가 남은 동강이 얼마나 광포하게 우리를 할퀴고 가는지를 보여주는 상처난 열정의 명징한 무늬들입니다.
그런데 왜 타다가 남을까요? 왜 타다 말고 무겁게 주저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눈물을 삼키며 경직된 표정이 될까요? 그것은 나를 두고 이리 재고 저리 재는 별 볼 일 없는 연인 때문이라기보다 차라리 소멸을 두려워하는 ‘나’ 때문입니다. 문명의 길들여진 허영심과 인습을 넘어서지 못하는 편견 덩어리, ‘나’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나’가 원초적인 열정을 막고 있으면 안정적인 것은 인습이고, 잃어버리는 것은 내 삶이고 내 표정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언제나 자승자박인 모양입니다.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은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캐서린이 아름답다고 할 때 그 아름다움은 자기 표정에서 옵니다. 바람이 거센 폭풍의 언덕에 사는 소녀답게 캐서린은 언덕을 잘 타고 건강하고 직감에 강합니다. 캐서린은 조신하지도, 정숙하지도 않습니다. 차라리 그녀는 야성적이고 원초적입니다. 점잖고 여린 에드거 린튼이 건강하고 솔직한 캐서린을 좋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에너지 펄펄 넘치는 캐서린의 삶 깊숙한 곳에는 어둡고 거칠고 사나운 악마 같은 히스클리프가 있었습니다. 악마는 제어할 수 없는 열정의 상징입니다. 파멸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서운 열정의 힘,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아니무스입니다.
“만일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가 살아 있다면 나는 살아갈 거야. 하지만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사라진다면 이 우주는 아주 낯설어질 거야.”
이 무조건적인 열정의 고백은 히스클리프에 대한 캐서린의 무의식이고, 당연히 그녀의 삶의 예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을 떨구어낼 수 없었던 그녀는 가난하고 못 배운 히스클리프와 결혼하기는 힘들 거라 생각합니다. 그녀는 부자인데다 명예를 존중하는 너그러운 신사 에드거의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고독하고 거칠고 가난한 연인 히스클리프를 버리는 것이었고 무의식적으로는 자신의 아니무스를 외면하고 억압한 것이었습니다.
에드거 린튼과 결혼한 캐서린은 정숙하고 품위 있고 예의바르고 거만한 부잣집의 여주인이 되었습니다. 사실, 거만도, 품위도, 정숙도 캐서린의 표정이 아닙니다. 그 문명의 표정은 캐서린 안의 열정에 귀 막고 눈감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열정이 무엇을 원하는지 외면한 결과였던 거지요. 캐서린은 전부를 던지고 전부를 요구했던 히스클리프를 외면함으로써 문명으로 흘렀고, 잘 살게 되었지만 에너지를 잃어버렸습니다. 돌아온 히스클리프가 죽어 가는 캐서린에게 쏟아놓은 말들은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요구하는 열정의 말입니다.
“이제야 당신이 얼마나 잔인하고 위선적인 사람인지 알 것 같소. 왜 당신은 나를 멀리했소? 왜 당신은 자기 마음을 배반한 거지? 어떤 말도 내겐 위로가 안 돼! 당신은 이런 꼴을 당해 마땅해. 당신이 당신 마음을 죽인 거니까. …당신은 나를 사랑했소. 그런데 무슨 권리로 나를 버렸지? 불행도, 타락도, 신도, 악마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었는데… 내가 살고 싶은 줄 아시오? 나는 건강한 만큼 불행하오!”
이 악마 같은 열정을 모르고서 어찌 생이라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생은 순수하고 깨끗하게 타오르는 한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머지는 그를 기다리거나 추억하는 시간인지도. 그 순간을 위해 모든 파멸을 감수하는 자만이 생의 비밀을 아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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