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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28 18:59 수정 : 2005.07.28 19:01

최재봉 기자

최재봉의 문학풍경

평양 인민문화궁전 대회의장의 그 기이한 정적을 기억한다.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 첫날 본 대회가 열린 지난 20일 저녁. 대회 형식과 절차를 놓고 남북 양쪽 대표단 사이에 막판 이견이 불거지는 바람에 남쪽 작가들은 예정된 시각에서 서너 시간이 지난 뒤에야 회의장에 입장했다. 북쪽 작가들은 이미 대회장 안쪽 절반을 가득 채운 채 앉아 있었다. 그러나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는 가운데 회의장에 들어선 남쪽 작가들은 이내 당혹스러운 정적과 맞닥뜨려야 했다. 북쪽 작가들이 박수는커녕 자리에서 미동도 않은 채 냉담한 눈길로 쳐다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를 찾아 앉은 남쪽 작가들도 곧 북쪽 작가들과 비슷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헛기침이 정적을 깨뜨릴 뿐 널따란 회의장 안은 여름 한낮의 호수처럼 고요했다. 그 묘한 ‘대치’는 주석단이 입장하기까지 족히 삼십 분 정도는 이어졌던 것 같다.

 그 침묵 속의 대치는 어쩌면 5박6일 일정의 남북작가대회 기간 내내 작가들을 따라다녔다고 보아도 좋았다. 물론 남과 북의 작가들은 한 목소리로 통일을 외쳤고 술잔을 부딪쳤으며 악수와 포옹, 웃음과 눈물을 나누었다. 그럼에도 양쪽 사이에는 가슴 속 깊이 묻어 둔 채 차마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한 침묵의 영토가 엄연히 있었다. 북쪽 작가들의 속말을 들을 기회는 없었지만, 남쪽 작가들의 회의와 불만의 소리는 싫도록 들어야 했다. 평양 시내건 백두산이건 온통 항일투쟁, 그리고 주석-국방위원장 부자의 혁명 위업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부여하는 버릇이 남쪽 작가들에게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상당수 남쪽 작가들에게 다만 ‘허영의 전시장’으로 다가왔을 따름인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 관람을 마친 뒤에는 상황이 더 심각했다. 이 특별한 공간을 침묵 속에 둘러보고 나온 남쪽 작가들은 처연한 심사를 감추지 못했다.

정말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순간은 백두산 일출이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어둠을 밝히며 올라선 백두산 정상 위에는 둥근 달이 환하게 떠 있었다. 그 달이 서쪽으로 조금씩 내려가면서 동녘 하늘은 점차 벌게졌고 마침내 양쪽 하늘에 달과 해가 함께 걸려 있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달이 해를 마중하고 해는 달을 배웅하는 천지의 신성한 시간. 해와 달, 하늘과 땅, 인간과 자연이 조응하는 그 뻐근한 순간을 뉘라서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겨레의 영산 백두산에서 천지신명을 두루 입회시킨 가운데, 남과 북의 작가들은 통일을 약속한 것이었다.

더불어 잊히지 않는 것은 백두산 삼지연 마을에서 마주친 소녀의 미소와 손 인사다. 소녀는 남쪽 작가 일행이 탄 버스가 지나는 길가에 혼자 서 있었다. 수줍은 시선을 내리 깐 채, 그러나 아주 외면하지는 않으면서 이쪽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대고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다. 버스 안에서 먼저 흔드는 손을 확인하고서야 소녀는 비로소 밝게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었다. 백두산 야생화만큼이나 수수하게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 수줍은 자태와 소박한 미소는 북조선의 오늘을 상징하는 것만 같았다. 북쪽은 어디까지나 소수자이자 약자의 처지. 먼저 악수의 손을 내밀거나 미소를 지을 형편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고 웃음을 보여야 한다.

물론 분단은 허구가 아니고 통일은 감상이 아니다. 그러나 사상 초유의 남북작가대회는 분명 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제 우리는 헤어짐의 슬픔이 아니라 만남의 기쁨을 노래할 것”이라고 황석영씨는 평양 도착 성명에서 다짐했다. “오늘은 분단의 상처를 노래하지만 머지 않은 날 우리는 통일의 기쁨을 노래할 것”이라고 홍석중씨는 백두산정 연설에서 예고했다. 남과 북을 대표하는 두 소설가는 공동 창작을 하자는 약속을 공개했다. 문학적 통일을 위한 첫걸음이 떼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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