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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한겨레문학상 받은 조두진씨의 장편 <도모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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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통이 데굴데굴 굴렀다…입에서 밥알이 튀어나왔다” 형용사 버린 ‘비정의 문체’ 간결하고 건조해 참상 증폭 포로 조선여인 사랑 ‘대비’ 냉혹한 전장 온기 불어넣어
제1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조두진(38)씨의 장편소설 <도모유키>(한겨레신문사)가 책으로 나왔다. <도모유키>는 정유재란 끝무렵인 1597년 말에서 이듬해 말까지 1년 정도의 시기를 배경 삼은 역사소설이다. 무대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산성을 쌓고 기울어 가는 전세를 버팅기던 순천 인근 해안. 주인공은 고니시 휘하의 왜군 하급 지휘관 도모유키와 그가 사랑한 조선 여인 명외다. 명외는 도모유키의 병사들에게 사로잡혀 아비와 함께 왜성에 갇혀 있는 신세다. 소설은 일본 군인 도모유키의 시각에서 정유재란을 그린다. 아(=조선)가 아닌 적(=왜)의 처지에서 전쟁을 다루었다는 데에 이 소설 <도모유키>의 일차적인 개성이 있다. 심사위원으로서 이 작품을 수상작으로 뽑은 문학평론가 김윤식 명지대 명예교수는 “‘우리 것만 제일’이라는 식에서 벗어나 한국의 독자와 작가도 더 성숙해져야 한다는 요구에 부합하는 작품”이라고 <도모유키>의 의의를 평가했다. 이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극단적이리만치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 작가는 후기에서 “품사로서 형용사와 부사뿐만 아니라 형용사나 부사 구실에 머무는 문장과 단락은 버리려 애썼”노라고 밝히고 있다. 수상자 발표에 즈음한 인터뷰에서 그는 현직 신문 기자라는 자신의 직업이 그와 같은 문체적 특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이른바 ‘팩트(사실)’에의 충실이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도모유키>의 소재가 전쟁이라는 점에서 이런 식의 문체를 달리 ‘비정의 문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쟁이 빚어내는 ‘잔인’ ‘끔찍’ ‘공포’ ‘슬픔’ 등의 정조는 좀처럼 문장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법이 없다. 그것들은 명사와 동사만으로 이루어진 뼈대뿐인 문장의 이면에서 다만 그림자로서만 어른거릴 따름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가난한 문장들이 온갖 실감나는 수식어로 뒤발된 문장들보다 더 강력하게 전쟁의 참상을 증거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감정 풍부한 작품들에서 작가에게 부림받던 정조들은 이 소설에서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할애됨으로써 효과를 극대화한다. 두 부분을 읽어 보자. “머리통이 데굴데굴 굴렀다. 반쯤 벌어진 입에서 밥알이 튀어나왔다.(…) 목을 잃은 몸뚱이가 하늘을 향해 반듯하게 누워 있었고, 병졸들이 달그락거리며 밥그릇 긁는 소리만 울려퍼졌다.”(51~52쪽) “아침에 태어난 딸을 죽인 아비는 점심 때 괭이를 들고 밭으로 나갔다. 남편 손에 갓 낳은 아기를 맡긴 아내는 묽은 된장국을 마셨다. 서둘러 된장국을 삼키고 나면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갔다.”(71쪽)삶이 곧 전쟁, 전쟁이 곧 삶 앞의 인용문은 왜성에서 성벽 보수 공사를 하던 중 다친 조선인이 점심밥을 먹다가 감독 무사의 칼에 목이 잘려 죽는 장면을 그린 대목이다. 식사 중인 포로의 목을 베는 무사의 잔인성은 목 잘린 주검 곁에서 의연히 밥그릇의 밥을 긁는 병사들의 비정한 모습과 어울려 전쟁의 냉혹성을 아프게 부각시킨다. 이것을 비인간적인 풍경이라 말할 수도 있겠고, 오히려 인간적인 풍경이라 할 수도 있겠다. 뒷부분은 같은 전쟁 무렵 일본의 굶주린 농부 부부가 아이를 낳았을 때 취하는 행동을 묘사한다. 새끼를 먹일 도리가 없는 부부는 제 손으로 아이의 목을 조르거나 산 채로 땅에 묻는다. 그들이 놓인 처지에서 ‘호구’란 곧 호랑이 입과 마찬가지인 것이어서, 자칫 불어날 수도 있었을 식구 수를 현상대로 묶어놓는 것이 절박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이 엄마는 그런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일상으로 복귀한다. 두 개의 인용문이 보여주는 것은 삶이 곧 전쟁이고 전쟁이 곧 삶인 지옥도의 세부들이라 할 법하다. 전쟁 속의 삶과 삶 속의 전쟁 중 어느 쪽이 더 우월하고 도덕적인가를 묻는 일은 부질없다. <도모유키>의 세계에서 그런 구분은 그닥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도모유키>가 부조리극이나 잔혹극처럼 출구 없는 절망과 염세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의 비정과 부조리 속에서도 주인공 남녀의 사랑이 있어서 소설은 인간적 체온을 잃지 않는다. 도모유키와 명외의 사랑은 마치 흑백 처리된 화면 속의 컬러 부분처럼, 잿빛 전장을 콘트라스트 효과 삼아 화사하게 피어난다. 물론 ‘화사하게’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명외는 어디까지나 포로 신분이고, 그를 사랑하는 도모유키인즉 그를 잡고 있는 적국의 병사 신분이다. 이처럼 공정하지 못한 처지에 놓인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가능하단 말인가? 가능하다고, 도모유키와 작가는 믿는다. 병사들을 데리고 조선인 마을을 덮친 도모유키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여자의 얼굴에서 여동생 이치코를 보”면서 사랑은 비롯된다. 적국의 여자를 여동생과 동일시하는 순간, 전쟁의 냉혹성은 미소와 온기로 몸을 바꾼다.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게다가 점점 기울어져 가는 전세의 흐름을 거슬러 가면서 도모유키는 최선을 다해 명외를 지키고 보살피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고자 한다. 이 이상한 사랑은 최초의 두려움과 거부감에서부터 회의와 망설임을 거쳐 조금씩 명외의 가슴에 안착하게 된다. 그리하여 왜군의 최종적인 후퇴를 앞두고서 도모유키가 명외 부녀를 성 밖으로 탈출시킬 적에 그 절박한 사랑은 “도모유키 님, 같이 가요”라는 명외의 제안으로 비로소 답을 얻는다. 그러나 그에 대해 도모유키가 할 수 있는 말은 “와타시와 아나타오 아이시테마스”(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라는 적국의 언어일 뿐, 두 사람 사이에는 언어의 차이만큼이나 근본적이고 불가항력인 벽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김훈 <칼의 노래> 떠오르기도 “밀물 때 해자는 넘쳤고, 썰물 때 해자는 뻘이 됐다”(28쪽)거나 “전장에서 적과 아는 구분되지 않았다”(237쪽)와 같은 문장, 무엇보다 “조선의 수군 대장은 찰나에 죽고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바다에서 죽어 육지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197쪽) 같은 대목은 김훈씨의 평판작 <칼의 노래>를 떠오르게도 한다. 이와 관련해 김윤식 교수는 “<칼의 노래>가 <난중일기>라는 원작의 ‘번안’인 반면, <도모유키>는 독자적인 상상력과 새로운 관점의 소산이라는 점이 두 작품의 가장 큰 차이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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