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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28 19:29 수정 : 2005.07.28 19:34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 발행인

압구정 아파트촌 돌아보고 “여기가 서울의 슬럼가냐” 독일인 교수가 묻더란다 배타적 이기심에 따른 고층 아파트단지 개발 상호부조에 바탕한 사회적 약자의 삶을 허문다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내가 잘 아는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그분이 한국을 처음 방문한 어떤 독일인 교수를 안내하여 자동차로 서울 거리 여기저기를 돌아보던 중 압구정동 아파트 단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 독일 사람이 “여기가 서울의 슬럼가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아무 선입견 없는 이방인의 눈에 대규모 콘크리트 건물들 가운데로 무수한 자동차들이 질주하고 있는, 소음과 오염된 공기와 어지러운 광고판 일색의 거리가 슬럼으로 비쳤다는 것은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오히려 이 동네가 지금 한국사회의 돈과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곳임을 그 독일 사람이 알았다면 얼마나 놀랐겠는가. 왜 한국의 부자들은 이토록 삭막한 환경에서 살고 싶어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기는 외국인이 어떻게 보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삶이 지금 과연 얼마나 인간답고 품위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산 자락에 있는 궁벽한 토착마을에 미국의 한 사회학자가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때 마을사람들은 말로만 듣던 부자나라 사람에게 여러 가지 궁금한 것들을 질문했다. 미국에는 집집마다 텔레비전과 전화기와 자동차가 있다는 데 사실이냐. 집집마다 하나가 아니라 몇 대씩이나 있고, 전화는 개인마다 휴대전화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답변에 그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에게 미국은 천국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미국 사람들은 친척이나 이웃사람들과도 거의 만나는 일이 없고, 친구 집에도 미리 전화로 약속을 해놓고 찾아가야 한다는 이 사회학자의 부연설명을 듣고는 그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런 곳이라면 자기들은 미국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생각에는, 사전약속을 해야 하는 사이라면 그것은 친구가 아니었다.

이 일화는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 돌아보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아프리카 토착인들이 미국인들보다 자기들이 더 행복하다고 여길 때 거기에는 그들의 가난이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방식이 유지되어온 것이다. 확실히, 부유한 사람들이 타자에 대한 동정적 상상력을 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부자가 천국으로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겠는가. 결국, 상호부조나 협동과 같은 ‘삶의 지혜’는 어느 정도 ‘결핍’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해 전에 나는 <가난-민중의 부(富)>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일찍이 유엔주재 외교관을 지낸 아프리카의 한 지식인이 쓴 이 책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아프리카는 결코 절망의 땅이 아니며, 아프리카의 빈곤은 엄연히 존재하는 현상이지만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것은 오히려 아프리카 풀뿌리 민중사회의 풍요로움의 토대가 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가난하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토착 민중경제는 상부상조에 기초한 증여경제를 발전시켜왔고, 이 호혜적 관계망 속에서 사람들은 공생공락의 삶을 누려왔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전통 마을에서는 누구도 굶주려 죽을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이 생겨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가난(poverty)과 비참(misery)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비참’이 실제로 오늘날 아프리카의 현실의 일부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식민주의의 소산이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기아문제는 흔히 아프리카의 농부들에게 식량자급을 위한 농사가 아니라 수출용 환금작물을 재배하도록 강요하는 소위 글로벌 시장경제의 논리에 기인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빈곤을 운위하며, 자신의 약탈적 생활방식을 돌아보지 않는 ‘선진국’들의 행태는 위선이며 속임수이다. 문제해결의 열쇠는 세계의 토착농민들을 땅에서 내쫓고, 갈수록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글로벌 시장경제 체제의 극복에 있는 것이다.

최근 서울 강북지역의 뉴타운 재개발로 지어진 새 아파트에 실제 그곳 ‘원주민’이 입주하는 비율이 10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조사결과가 발표되었다. 지금 강북지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사업은 주거환경 개선과 집값 안정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서울을 포함한 대도시 변두리나 산동네의 소위 ‘원주민’들은 대개 지난 수십년간 산업화,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고향에서 쫓겨났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뿌리가 뽑힌 채 도시의 밑바닥으로 흘러 들어온 그들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비록 볼품없는 집이지만 이웃과 함께 삶터를 형성하고, 그들과의 연대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동네는 땅과 아파트에 대한 끊임없는 투기를 통해 떼돈을 벌면서, 배타적인 이기심 이외에 어떠한 인간적 가치도 망각한 채 살아온 사람들의 번듯한 고층 아파트 동네보다도 더 품위있는 삶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에는 그러한 소중한 삶터를 완전히 허물어버리고 그 자리에 근대식 고층 아파트를 대대적으로 건설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근본적인 질문과 토론이 없었다. 모두가 도시의 미관과 ‘경제’를 위해서 당연한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단지, 비판적인 목소리가 있다면, <한겨레>의 경우처럼, 사회정의의 원칙에서 원주민의 뉴타운 입주 비율을 더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 개진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결코 간과해서 안 될 것은 그 열악하다는 종래의 주거환경이 아파트라는 자폐적인 주거공간으로 변할 때 그 변화가 지금까지 상호부조의 연대를 기반으로 생존을 영위해온 풀뿌리 민중의 삶에 끼칠 치명적인 손상이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뉴타운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라는 타이틀의 <한겨레> 7월19일치 사설과 관련 기사를 주의깊게 읽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이 쫓겨난 원주민들이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근대화라는 것이 사회적 약자의 삶에 대한 깊고 섬세한 배려를 배제하는 것이라면, 시인 김수영의 말처럼, “이런 식의 근대화는 그 완성이 즉 자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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