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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은 과학의 발전을 정상과학 → 위기 → 과학혁명 → 새로운 정상과학으로 이어지는 불연속적인 것으로 보았다. 쿤의 과학혁명은 왕정이 붕괴하고 공화정이 세워지는 것 같은 사회혁명과 흡사한 것이었다. 그림은 프랑스혁명을 그린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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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과학→위기→ 혁명 →새 정상과학 4단계 발전 ‘과학이 절대 진리 향해 나간다’는 진보 개념 부정 서로 다른 패러다임 사이에는 과학적 소통 불가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사회학 등에 큰 영향 미쳐 “쿤은 과학 합리성 무시한 상대주의자” 비판 받기도
과학속 사상, 사상속 과학/ ⑪ 토머스 쿤과 ‘과학혁명’ 토머스 쿤(Thomas Kuhn, 1922~1996)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사·과학철학 분야를 넘어서 과학일반, 철학, 역사, 인류학, 사회과학, 페미니즘, 국가정책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시카고대학 출판부가 발간한 학술서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힌 책이었고, 24개 국어로 번역되어 모두 100만부 이상이 팔렸다. ‘과학혁명의 구조’ 100만부 이상 팔려 1922년 미국 신시내티에서 태어난 쿤은 1940년에 하버드대학교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당시 2차 세계대전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그는 3년 만인 1943년에 학사학위를 받고, 곧바로 레이더 연구에 투입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물리학과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그의 관심은 이미 고대 철학과 칸트 철학으로 기운 상태였다. 쿤은 당시 하버드대학교 총장 코넌트의 추천에 의해서 1948년 봄에 하버드대학교의 주니어 펠로로 임명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 국방연구위원회의 의장을 지낸 코넌트는 전후 하버드의 교육개혁을 주도했는데, 그의 개혁의 핵심은 비자연과학 전공 대학생에게 자연과학의 핵심 방법론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 수업을 위해 코넌트는 쿤을 조교로 고용했고, 쿤은 교재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과거 자연철학자들의 원전을 접하게 되었다.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에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윤리학이나 인식론과 같은 철학에서는 지금 보아도 합리적인 설명을 제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물체의 운동을 설명할 때는 그렇게 ‘멍청해 보이는’ 설명을 고수했는가라는 것이었다. 갈릴레오와 뉴턴에 의해서 완성된 고전물리학을 배운 사람이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은 정말 한심할 정도였다.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쿤은 1948년의 여름에 ‘계시’와도 같은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개념이 물체의 거리 이동만이 아닌 변화 일반을 포괄하는, 근대적 운동 개념과 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었다. 운동을 이렇게 파악하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이 무척 합리적으로 이해되었고, 더 나아가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17세기 갈릴레오의 물리학 사이에는 단순한 계단식 발전이나 오류의 교정이 아닌 혁명과 같은 단절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었다. 1962년에 출판된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발전의 ‘구조’를 분석하고 있다. 쿤에 의하면 과학발전의 구조는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4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곧 과학자 사회가 자신들의 이론·연구를 가능케 하는 도구와 문제의 총체인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면 이 과학 분야는 1)정상과학(노멀 사이언스) 단계에 들어간다. ‘퍼즐 풀이’로 특징지워지는 정상과학이 발전하다가 그 패러다임 안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인 변칙이 등장하면, 이러한 변칙은 2)위기의 단계를 낳는다. 위기가 지속되면 기존의 패러다임과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 갑자기 등장하고, 두개 혹은 그 이상의 패러다임이 경쟁하는 3)과학혁명의 단계에 접어든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과거의 패러다임을 제치고 과학자 사회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면 4)새로운 정상과학의 단계가 시작된다. 곧 과학의 발전은 정상과학 → 위기 → 혁명 → 새로운 정상과학으로 이어지며, 여기서 보는 과학혁명은 왕정이 붕괴하고 공화정이 세워지는 것 같은 사회적 혁명과 유사하다. 패러다임이 수립되면 과학자들에게 풍부한 자원을 제공한다. 패러다임은 과학자들에게 다양한 문제를 다루고 해결하는 방법을 주며, 어떤 문제가 중요한 문제인지 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준다. 또 패러다임은 표준적 방법에 의해 중요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확신을 과학자들에게 제공한다. 게다가 패러다임은 실험과 측정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렇게 패러다임을 완벽하게 하고 측정값을 정교하게 하는 행위가 곧 쿤이 정상과학이라 지칭한 활동이다. 칼 포퍼 “쿤의 정상과학은 과학 모독” 그러므로 정상과학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정상과학에는 기존의 이론 체계를 부수고자 하는 도전의 정신이 없다. 이 점 때문에 과학의 발전을 과감한 추측과 논박의 연속으로 파악했던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쿤의 정상과학이 과학에 대한 ‘모독’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정상과학이 혁명적으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맛이 없는 보수적 작업이라면 왜 과학자들은 과학연구에 몰두하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쿤은 정상과학을 퍼즐 맞추기에 비교했다. 퍼즐을 즐기는 사람은 그 문제에 답이 있고 따라서 언젠가는 이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재미를 느끼고 문제 풀이에 몰두하곤 한다. 이것이 정상과학을 수행하는 과학자들의 경험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쿤의 생각이었다. 정상과학이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변칙적 문제를 만나면 위기의 국면과 과학혁명의 국면으로 접어든다. 변칙의 출현은 혁명의 전조인 것이다. 물론 한 두 개의 변칙이 출현한다고 항상 패러다임이 폐기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 패러다임은 이론 및 가정 일부를 변경하여 보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변칙들이 과학의 기본 틀까지 변경하는 것을 요구하면, 그 때 과학은 위기의 국면에 들어간다. 위기가 고조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 신구 패러다임이 경쟁하는 혁명단계에 진입한다. 과거의 패러다임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과학자들은 그것이 더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새 패러다임의 미적 단순함 또는 아름다움과 같은 과학외적 요인에 끌렸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쿤에 의하면 패러다임 전환은 점진적이고 논리적인 선택이 아니며 오히려 종교적 ‘개종’과 유사하다. 따라서 과학혁명 시기에는 철학적, 제도적, 사상적 요소들이 이론의 선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해석 때문에 쿤은 과학의 합리성을 무시한 상대주의자로 비난받았으며, 과학철학자와 임레 라카토스는 쿤의 패러다임 전환이 과학이론의 선택을 ‘군중심리’(몹 사이콜로지)로 환원했다고 하면서 쿤을 맹렬히 비판했다. 쿤의 저서에서 가장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점은 두 패러다임의 비교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쿤은 아리스토텔레스 패러다임과 뉴턴 패러다임 사이에, 혹은 뉴턴 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사이에 ‘공약 불가능성’(인커멘슈러빌리티)이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공약 불가능성이란 두 패러다임이 같은 척도로 비교될 수 없다는 뜻인데, 실질적으로는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쿤은 과학의 발전이 완벽한 진리를 향해서 한발자국씩 접근한다는 전통적인 과학의 진보 개념을 부정했다. 또 쿤의 철학에는, 과학이 자연에 존재하는 진리를 발견한다는 소박한 실증주의적 생각을 부정하는 요소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과학자들의 연구를 결정하는 패러다임은 과학자 공동체에서 만들어낸 것이지, 자연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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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욱/서울대학교 교수·과학기술사 comenius@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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