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8.04 16:13 수정 : 2005.08.04 16:15

역사로 보는 한 주

미국이 1945년 8월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이유는?

 “미국은 ‘(일본) 본토 결전 때 예상되는 미·일 쌍방의 희생자를 구하기 위해 원폭으로 일본의 저항의지를 깨뜨려 항복으로 이끌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시 일본정부가 전쟁종결을 위한 물밑 공작을 활발히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원폭 투하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포츠담선언 수락의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고 하긴 어렵다. 이 때문에 피해국인 일본에서는 그런 시각보다는 오히려 소련에 대한 견제용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미국은 소련의 참전을 눈앞에 두고 전후 극동지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줄이고)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서둘러 원폭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또 일본군의 진출로 피해를 본 중국 등의 나라들에게는 ‘원폭 덕에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됐다’는 인식도 있다.”

전형적인 일본식 해설 가운데 하나다. 여기엔 동아시아인 수천만을 살상한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피투성이 자취는 없다. 졸지에 일본을 가해국이 아니라 피해국으로 둔갑시키는 일본내 우파들이 상징조작의 재료로 삼는 것들 중의 하나다. 도쿄 대공습 등 미군기들의 일본 폭격도 같은 재료가 된다. 물론 저들의 주장엔 일면의 진실이 있다. 핵무기를, 그것도 대도시 일반시민을 상대로 무차별 사용한 미국의 만행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그것은 인류사적 중대 범죄행위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 제국주의 침탈의 죄과, 그리고 자신도 한패가 됐던 구미 ‘제국주의 동지들’과의 빼앗기 싸움을 빌미로 침략전쟁을 해방전쟁으로 호도하고 숱한 자국인 외 피해자들을 전쟁이 끝난 뒤에도 능멸한 죄과가 그보다 더 가벼워질 리는 없다.

원폭 ‘리틀 보이(꼬마)’가 히로시마 도심 상공 580m에서 터졌을 때 폭심 부근의 철재와 유리가 녹아내렸고 반경 2㎞내의 건물은 거의 모두 파괴됐다. 당시 34만2천의 히로시마 인구 중 폭심지에서 1.2㎞내에 있던 사람은 50%가 그날로 숨졌고, 45년 12월 말까지 모두 14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됐다. 화상, 기형출산, 암 등 후유증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팻맨(뚱뚱이)’이 폭발한 나가사키에서는 24만 인구 중 3만5천명이 즉사하는 등 7만명 이상이 숨지고 6만여명이 다쳤다.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