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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04 16:52 수정 : 2005.08.04 16:55

정재승의 책으로 읽는 과학

모든 살인은 증거를 남긴다
브라이언 이니스 지음, 이경식 옮김, 휴먼앤북스 펴냄, 2005

1900년 7월1일, 독일 발트해 연안의 한 섬에서 두 형제가 끔찍하게 살해된 사건이 발생한다. 용의자는 그 지역을 여행하던 목수 루드빅 테스노프. 그의 옷과 구두에는 피처럼 보이는 검은 얼룩이 묻어 있었으나, 루드빅은 나무의 진이 묻어서 생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검사는 당시 독일의 유명한 생물학자 폴 울렌후스를 찾아가 사건에 대한 도움을 청했다. 때마침 폴 울렌후스는 토끼의 혈청을 이용해 천에 묻은 얼룩이 사람의 피인지 아닌지를 구별해내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고 있었다. 폴 울렌후스가 훗날 ‘울렌후스 검사법’이라고 불리게 될 방법을 이용해 목수 옷에 묻은 얼룩을 분석한 결과, 검은 얼룩은 사람의 피로 판명 났고, ‘미치광이 목수’ 테스노프는 곧바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과학저술가이자 범죄소설가 브라이언 이니스가 쓴 <모든 살인은 증거를 남긴다>에 소개된 수많은 살인 사건 중 한 토막이다. 테드 번디 사건이나 리 하비 오스왈드의 케네디 암살 사건 등 세상을 경악하게 만든 역사적 사건들이 사진과 함께 사실적으로 서술돼 있는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기분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끔찍한 살인이 단지 ‘비극적 사건’으로만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과학자들은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최신 법의학 기술을 적용하고 새로운 과학수사법을 도입했다는 사실이다. 모든 살인은 증거를 남길 뿐 아니라, 새로운 과학도 탄생시켰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모든 범죄는 서로에게 흔적을 남긴다’는 20세기 초 프랑스의 범죄학자 에드몽 로카르의 법칙을 연상시킨다. 범죄는 반드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부딪힘을 동반하게 되고, 그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흔적을 남긴다. 이 피할 수 없는 흔적을 과학으로 추적한다면 범인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 로카르의 이론이다. 너무 당연해 보이는 이 법칙은 20세기 법의학과 과학수사의 체계를 이루는 데 중요한 기본 원리로 작용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더욱 교묘해진 범죄수법과 ‘묻지마 범죄’처럼 범죄 동기조차 명확하지 않은 사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우울한 것은 이런 끔찍한 비극 속에서 우리는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연쇄살인범이 무참히 사람들을 죽이고, 규명되지 않은 사건들이 빼곡이 쌓여 있어도 억울한 자의 한을 푸는 데에는 소홀한 것이 우리 현실이다.


원나라 왕여의 저작 <무원록>에 세종의 명으로 주석과 음훈을 병기한 조선 법의학의 지침서 <신주무원록>(사계절, 2003)을 보면, 과학수사만 놓고 보자면 조선시대에 비해 우리 사회가 별로 나아진 점이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나라 과학수사 예산을 대폭 늘리고 법의학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공무원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텔레비전 드라마 <시에스아이(CSI) 과학수사대>나 <모든 살인은 증거를 남긴다> 같은 책을 많이 봐야 할텐데, 그들은 이 여름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시스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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