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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04 16:59 수정 : 2005.08.04 17:02

‘한국과학사상사’

인터뷰/ ‘한국과학사상사’ 낸 박성래 교수

 “조선 세종이 아버지(태종)의 위세에 가려 왕 다운 왕의 행세를 하지 못했던 ‘세종 1년’에 해가 흐릿하게 보이는 ‘햇무리’의 관측기록이 유난히도 많았던 것은 왜였을까. 임금의 권위가 손상된 시대 상황이 당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햇무리가 더 많이 관측되고 기록에 남은 탓이겠지요. 쿠데타를 상징하는 혜성의 기록과 남이 장군의 죽음에도 깊은 연관성이 있죠. 자연현상의 옛 기록들은 그저 객관적인 데이터들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당대 인간사회에 어떤 의미를 지닌 것들입니다.”

 ‘박성래의 한국과학사 전집’의 첫 권으로 삼국시대와 고려·조선시대 사람들의 자연관을 다룬 <한국과학사상사>(유스북 펴냄)를 최근 낸 박성래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옛 사람들이 자연현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우리 역사를 풍부하고 생생하게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나 기이한 자연현상인 ‘재이()에 대한 기록들은 “종종 국가의 운명과 정치권력의 다툼에도 깊이 관련돼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삼국사기>에는 약 1000개, <고려사>에는 약 6500개의 자연현상에 관한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의 실록으로 내려가면 더 많은 빈도로 자연현상 기록이 나오는데, 우리 역사가들은 이를 무시한 채 한국역사를 서술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일식·월식, 태양 흑점, 혜성, 별똥별, 가뭄, 지진, 누런비, 심지어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변괴 기록 등은 당대인들한테 자주 나라의 운명이나 왕의 덕치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이런 사상은 조선시대에 와서 성리학의 영향으로 더욱 강화되어 “사화와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박 교수는 말한다.

 “자연현상을 국가의 운명과 연관지어 설명하려 했던 조선시대의 ‘재이론’은 신하들이 왕권을 통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조선 초기 동안 성리학의 성장과정에서 함께 가꿔졌다고 할 수 있죠. 그 과정에 재이론을 둘러싼 심각한 정치적 충돌도 있었습니다. 신진 사림파들의 재이론에 맞서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연산군은 사화를 일으켜 재이사상을 무력화시키고자 했고요. 조선 중기 이후에 성리학이 안정세력을 이루면서 재이론도 안정화되었고 그 형식은 조선 말까지 이어져왔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자연현상의 재이에 관한 기록들은 매우 ‘정치적’이며 ‘역사관’의 문제다.

박 교수의 이런 해석은 30여년 전에 시작됐다. 1961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그는 7년 동안 신문기자 생활을 하다가 서양과학사를 공부하겠다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정작 미국에 가서야 그는 한국과학사로 눈을 돌렸다.

 “서양과학을 공부하면서 처음으로 한국과학사를 돌아보기 시작했고, 한국에서도 하지 않던 한국역사 공부를 미국에서 시작하게 됐네요. 우리 사료를 뒤적이다보니 거기엔 생각하지도 못했던 자연현상의 기록이 아주 많다는 데 놀랐습니다. 그리곤 <삼국사기>와 <고려사>,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초기에 있는 재이 기록을 샅샅이 훑어 메모장에 기록하고 컴퓨터에 입력해 통계처리를 했습니다.” 그 일에 몇 년이나 걸렸다. “그러면서 의문 하나가 떠나지 않았는데, 왜 옛 사람들은 재이에 주목하고 보고하고 논의하고 역사에 기록을 남기고자 했는가라는 점이었습니다.” <조선 초기의 재이와 정치>(1977)라는 독특한 제목의 박사논문이 나온 것은 이런 오랜 작업과 성찰의 결과물이었다. 이 논문의 기초에다 후속연구의 피와 살이 더해 풍부하게 완결하는 식으로 지난 1992년부터 계간 <과학사상>에 10년 동안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출간된 것이 <한국과학사상사>다. 그는 앞으로 <과학인물열전>의 한국편과 외국편을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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