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04 18:14
수정 : 2005.08.0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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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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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붉게 핀단들 대추꽃이 서있단들 시와 소설은 시비거리 없소만 평론은…
김윤식 교수의 문학산책
한강 둔치에 만발한 찔레꽃 일곱 무더기가 어둠을 온몸으로 밀어내고 있는 장면을 보셨는가. 홍수 지난 뒤 저절로 나고 자란 이 둔치의 한 가지 숨은 기적이라 하면 안 될까. 초승달이 미소짓고 떠난 뒤에도 어둠이 감히 스미지 못하는 이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아득한 데서 헛것인 듯 들려오는 여가수 백난아의 목소리.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아무도 이 대목에 백설처럼 흰 것이 찔레꽃이라고 시비를 걸지 않았소. 저 역시 그러하오. 꽃은 원래 붉은 것이니까. 자줏빛이든 흰빛이든 검은빛이든 그것이 꽃의 색깔이라면 붉어 마땅하다는 이 생각만큼 자연스런 것이 따로 있으랴. 이와 썩 비슷한 현상이 줄을 잇고 있소.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반달>)도 그러하오. 돛대는 박는 것이 아니었던가. “앵두 따다 실에 꿰어”도 마찬가지. 실에 어찌 꿸 수 있겠는가. “아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미당 <자화상>)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 대추나무가 아니라 대추꽃이었으니까. 이러한 현상을 싸잡아 부르는 말이 있소. 시적 특권이 그것이오. 그런 특권을 누가 주었는가. 시인 스스로 쟁취했는가. 시비를 걸고자 함이 아니오. 좌우간 그렇다는 것이오.
그렇다면 소설적 특권도 있는 것일까. 물론이오.
“내가 중학교 이년 시대에 박물시험실에서 수염 텁석부리 선생이 청개구리를 해부하여 가지고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장을…”(염상섭 <표본실의 청개구리>)도 그러하오. 냉혈동물이 어찌 김이 모락모락 나겠는가.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도 사정은 마찬가지. 왼손잡이란 유전이 아니니까. “어느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꿈에서 깨자 침대 속에서 자신이 한 마리 거대한 독충으로 변했음을 알아차렸다”(카프카 <변신>)로 시작되는 이 소설에서도 과연 동물학적으로 그 독충(원어는 독충 Ungezierfer, 영역은 벌레 insect)이 실재하는 것인가에 대해 시비가 없지 않았소. 동물학 전공의 학자이자 소설 <롤리타>의 저자는 “허우적거리는 다리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아버렸다”라는 대목, 또 6개 이상의 다리를 가졌다는 점으로 미루어 동물학적으로 갑각류일 수 없다고 했지요. 갑충엔 눈뚜껑이 없어 눈을 감을 수 없으니까. 또 갈색이라는 이유로 바퀴벌레로 추정하나 이 역시 날개의 있고 없음으로 하여 확인 불가능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런 점을 들어 큰 오류라고 지적하거나 모질게 시비하지 않지요. 어째서? 소설적 특권이니까.
보다시피 글쓰기엔 시적 특권과 나란히 소설적 특권도 있소. 시적 특권, 소설적 특권이 있듯, 평론적 특권도 있을 수 있을까. 평론을 해오면서 이런 의문을 물리치기 어려웠소. 일찍이 김동인은 평론가란 활동사진 변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으나, 카프문학 이래 분단문학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 문학은 평론의 일방적 지도원리에 좌우되어 오지 않았던가. 이를 두고 특권이라 할 수 있을까. 만일 특권이라 하면 적어도 앞에서 든 시적, 소설적 특권과는 별개이겠지요. 그렇다면 평론적 특권은 아예 없는 것일까. 이 장면에서 문득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둘러싼 황순원·백철 논쟁(1960)이 머리를 스치오. 실상 작품 줄거리도 디테일도 정확히 지적하지 못한 처지에서 백철은 작품을 후려쳤던 것. ‘6·25를 4·19와 연결시키지 못했다’라고. 작가 쪽이 어이도 없어 할 밖에. 그러나 줄거리나 디테일이야 어쨌든 실험성을 앞세우라고 덤비는 백철의 논법이란 혹시 평론적 특권이라 할 수 없을까. 이 나라 문학의 뜻있는 주류적 쟁점인즉 6·25와 4·19의 연결 쪽이니까. 문학평론가·명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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