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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04 18:52 수정 : 2005.08.04 19:04

남재일/문화평론가

몸꽝의 당당함에 대한 열광과 몸꽝의 초라한 현실 자각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열광할수록 현실을 확인할 뿐이다 몸꽝을 생각하고 내면을 염려한다면 아예 관심을 끊어주는 게 최선이다

세설

삼순이가 태풍처럼 지나갔다. 한동안 대한민국은 삼순이와 열애에 빠졌다. 몸짱파와 얼짱파가 권력을 양분한 중원을 넉넉한 뱃살 하나로 평정해 버린 소림의 꽃돼지. 시청자들은 육중한 체중을 날카로운 이빨에 실어 적의 급소를 단숨에 제압하는 삼순이의 필살 직설법에 매료됐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아, 이렇게 퉁퉁한 여자도 저렇게 당당할 수 있구나! 아, 이렇게 촌티 나는 이름의 소유자도 저렇게 샤프한 코멘트를 할 수 있구나! 아, 이렇게 퉁퉁하고 촌티 나는 여자도 저렇게 당당하고 샤프하면 얼짱, 몸짱, 돈짱 삼박자의 남자가 알아봐주는구나!!! 그러니 평소 미디어 속에서 벌어지는 ‘짱들만의 잔치’에 열 받을 대로 받은 이 땅의 얼꽝, 몸꽝들에게 삼순이는 ‘우리들의 영웅’으로 비쳤을 법하다. 과연 삼순이는 ‘꽝’들의 영웅인가? ‘꽝’들의 일상적 삶에 어떤 희망을 주었는가?

어떤 이는 삼순이가 외모지상주의에 한방 먹였다고 추켜세운다. 또 다른 이는 진솔한 내면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시청자에게 삼순이가 그런 존재였음을 부인하긴 어렵다. 하지만 삼순이 떠난 빈 자리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몸꽝의 권리회복? 촌스러움의 약진? 내면의 진정성에 대한 공감? 삼순이 캐릭터가 조금이라도 현실감이 있다면 그런 일말의 기대마저 부인할 필요는 없을 거다. 하지만 삼순이의 프로필을 보라. 김삼순, 30세, 고졸, 과자 굽고 케익 만드는 직업, 편모슬하의 셋째 딸, 퉁퉁 푸짐한 외모…. 삼순이는 한국 사회에서 비주류로 분류되는 다양한 타자성의 집합체다. 그런데 삶에 대한 태도와 말 실력은 일류 중에 일류이다. 이게 가능한가? 삼순이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말할 기회도 별로 없고, 말 실력을 쌓을 조건도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어쩌면 이 부조화의 깊은 골 때문에 삼순이는 환영받았을지도 모른다. 문화상품의 폭발력은 대중의 좌절된 욕구의 정도와 비례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삼순이는 아주 다양한 비주류의 가슴에 쌓인 가래침을 대신 뱉어준 인물이다. 이 역할이 어떤 비용도 전제하지 않고 비주류의 멍든 가슴을 잠시 위무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면 삼순이는 비주류의 영웅이 맞다. 하지만 아무래도 삼순이가 남긴 게 무해한 대리만족 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삼순이는 적어도 두 개의 상흔을 남기고 지나간 폭풍 같다.

삼순이가 남기고 간 상흔
첫째 상흔은 몸꽝들의 의식 깊은 곳에 남겨 놓았다. 몸꽝의 당당함이란 환타지는 몸꽝의 초라한 현실에 대한 암묵적 인정 속에서만 환타지로 작동한다. 몸꽝의 당당함에 대한 열광과 몸꽝의 초라한 현실에 대한 자각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열광할수록 초라한 현실을 거듭확인할 뿐이다. 몸짱이든 몸꽝이든 그것이 궁극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몸에 대한 관심의 환기이며, 그 속에서 어떤 몸을 선택할 것인가는 드라마 밖의 현실이 너무나 분명하게 지시해주고 있다. 여성의 외모와 남성의 연봉이 비례하고 여성이 남자 얼짱보다 몸짱을 선호하는 현실은 무얼 말하는가. 현재의 2-30대에게 몸은 이미 계급의 표현이며, 생산의 수단이고, 소비의 대상으로 화폐처럼 표준화된 비교우위의 세계로 추구된다. 몸짱은 단순히 몸에 대한 미적 취향의 표현만은 아니다. 몸은 성을 매개로 신분 상승의 전방위적 경쟁이 전개되는 장소이다. 그러니 몸꽝에 덧씌운 어떤 아름다운 문학적 서사도 몸짱이 뿌리박고 있는 경제적 토대를 대체하진 못한다. 몸에 대한 담론은 궁극적으로는 몸짱에 대한 암시로 환원되는 폐쇄회로 속에 갇혀 있다. 성에 관한 담론이 아무리 해방을 노래하더라도 공공적인 유통과정에서 이미 육체에 각인된 성억압의 기제를 강화하는 역설로 작용하는 것처럼.

 그러니 진정 몸꽝을 생각하고 진정 내면을 염려한다면 몸에 대한 관심을 아예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이 최상이다. 삼순이라는 뚱땡이를 이중간첩으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 내용과 맥락에 관계없이 수시로 짱들을 화면에 들이미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상흔은 여자들의 주체성에 남겨 놓았다. 몸꽝의 당당함을 내세우는 순간조차 그 당당함을 승인하는 주체가 삼식이라는 이 유구한 설정. 그 당당한 삼순이가 뛰어봐야 삼식이 품안에 있다니…. 왜 삼식이는 비만인이 아닌 인물로 설정됐을까? 비만인이 비만인을 받아주면 환우회의 상부상조 같아서 영 맛이 안 날 것 같긴 하다. 거 참 이상하다. 사실은 이 설정, 비만인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천연덕스럽게 그리는 것이 진정한 몸꽝의 권리회복인데, 그게 상상만 해도 웃긴다니…. 김형곤과 출산드라가 로맨스의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게 웃긴다니….

사실 삼순이의 인기는 몸짱의 몸으로 몸꽝을 자처한 김선아의 ‘발언권’에 크게 기대고 있다. 이슬람 교도의 눈에 이라크로 망명한 미군이 얼마나 갸륵하겠는가. 무슨 말을 씨부렁거린들 귀엽지 아니하겠는가. 하지만 보라. 이제 김선아는 넉넉한 시간과 고비용을 요구하는 체중감량 시스템을 통과하며 다시 몸짱으로 씻은 듯 복귀할 것이고, 남겨진 몸꽝의 시선은 다시 몸짱에 조준될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남게 되는 ‘몸꽝의 경제학’ 대차대조표. 김선아는 인기를 얻었고, 방송국은 시청률을 높였고, 몸짱은 가호가치를 인정받았고, 몸꽝은 값비싼 환각제를 한대 맞았다. 그 대가로 몸꽝은 언젠가 다시 삼순이를 갈망할 것이고 상황은 다시 반복될 것이다. 이 시대 몸꽝의 처지가 자기 몸 버려가며 비싼 세금까지 내야하는 중증 니코틴 중독자의 신세와 흡사하다. 가혹한 체제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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