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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커토시(왼쪽)와 파이어아벤트는 다같이 철저한 포퍼주의자로 출발했지만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생각은 달랐다. ‘역사적 과학철학’이 탄생하던 1960년대, 이들은 날카로운 논쟁을 벌이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좋은 맞수이자 친구로 지냈다. 사진은 마테오 모텔리니가 99년 펴낸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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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뒤 열성 헝가리 공산당원 활동
56년 반소 봉기 실패 뒤 영국으로 탈출
과학사 연구과 과학 철학 접목시켜
이론의 역사적 발전양상 비교연구 강조
영국에선 좌파 비판한 우익 논객으로 유명세
과학속 사상, 사상속 과학/ ⑫ 임레 라카토슈
20세기 과학철학은 두 번의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첫째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빈(비엔나)을 중심으로 나타난 논리실증주의의 논리와 경험의 결합이었고, 다른 하나는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과학철학자들이 과학의 역사와 과학활동의 실제 모습에 보다 주목하게 된 ‘역사적 전환’이었다. ‘역사적 과학철학’이 탄생하던 이 시기에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포퍼, 쿤, 라카토슈, 파이어아벤트 등의 독특한 개성을 지닌 학자들이 과학방법론의 성격을 두고 날카로운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에서 라카토슈가 차지하는 위치는 특별하다. 라카토슈는 파이어아벤트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포퍼주의자로 출발했지만 역시 파이어아벤트와 마찬가지로 점차 포퍼의 견해가 지닌 여러 문제점에 대해 인식하게 된다. 지적으로 훨씬 자유분방했던 파이어아벤트는 포퍼와 쿤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길 원했지만, 라카토슈는 쿤을 따라 과학의 역사적인 실제 전개과정에 충실하면서도 포퍼를 따라 여전히 과학의 객관성과 합리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견해를 제시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전히 포퍼식의 개인주의적 자유를 강조하면서 쿤보다 훨씬 급진적으로 상대주의 과학관을 밀고나간 파이어아벤트와 죽을 때까지 좋은 맞수이자 친구로 지냈다. 라카토슈는 파이어아벤트가 런던정경대학에 잠시 머물며 강의할 때 강의실 바로 앞에 위치한 자신의 연구실에서 나와 파이어아벤트에게 난처한 질문을 던져대곤 했고, 두 숙적의 눈부신 토론을 지켜보는 것으로 수업을 대신할 수 있었던 당시 학생들은 너무나 즐거워했다고 한다. 파이어아벤트에 따르면 어느 날 라카토슈가 자신은 과학적 방법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쓰고 파이어아벤트는 왜 쓸모없는지를 써서 함께 묶어 책을 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과학방법론을 위하여 그리고 반대하며(For and Against Scientific Method)>라는 책을 함께 내기로 했다. 그러나 라카토슈가 1974년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파이어아벤트는 결국 자신의 부분만 홀로 출판하게 되고 이 책이 파이어아벤트를 일약 유명하게 만든 <반 과학방법론>이다.
숙청뒤 3년간 강제노동수용소 생활
1922년 헝가리 데브레센에서 태어난 라카토슈의 어릴 적 이름은 임레 립쉬츠였다. 립쉬츠는 2차대전 중에 라카토스로 성을 바꾼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수학에 재능을 보여서 폰 노이만과 같은 유명한 수학자들이 처음으로 논문을 출판한 학술지에 논문을 내기도 했다. 데브레센 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철학을 전공한 라카토슈는 2차대전 중 공산주의 계열 반나치 저항운동에 가담한다. 그는 지하세포조직 지도자로서 냉철한 판단력과 동료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고 철저한 스탈린주의자였다고 한다. 한때 자신이 이끌던 조직이 보안상의 위험에 처하자 이에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 에바 이작이라는 동료에게 자살을 종용하기도 했다. 라카토슈는 1947년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의 관점을 과학사에 적용한 학위논문으로 데브레센 대학을 졸업하는데, 현재 이 논문은 사본이 남아 있지 않다. 데브레센 대학도서관 소장본조차 라카토슈가 56년 서방으로 탈출하면서 가지고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전후 라카토슈는 헝가리 공산정부에서 매우 빠르게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시켜간다.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라카토슈는 올바른 목적이 어떤 수단의 사용도 정당화한다고 믿는 무자비한 열성당원으로 ‘끔찍할 정도로 똑똑해서’ 모든 상황을 계산하고 행동하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라카토슈는 50년 당내 실력자가 충분히 ‘스탈린주의적’이지 않다고 비판하다가 숙청당하여 악명높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3년간 생활한 뒤 풀려난다. 이때까지도 스탈린주의적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라카토슈는 후루시초프 등장 이후 헝가리 내부상황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신념을 바꾸게 되고 적극적으로 작가운동에 참가한다. 54년 헝가리 학술원의 도서관에서 금지된 서방 문헌을 읽고 일부를 헝가리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는데 이 때 포퍼의 글을 처음으로 읽고 큰 감명을 받는다. 56년 헝가리 반소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그는 20만 명의 동포와 마찬가지로 헝가리를 탈출하여 빈을 거쳐 캠브리지에 이른다. 그는 캠브리지에서 브레이스웨이트의 지도 아래 수학적 증명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런던정경대학의 포퍼 세미나에도 빠짐없이 참석한다. 라카토슈는 학위를 마친 60년 결국 런던정경대학 철학과에 자리를 잡게 되고, 그 후 14년 동안 그곳에서 가르치면서 헌신적인 지지자와 극단적인 반대자를 모두 얻는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이 그러했듯 라카토슈는 자신의 멘토였던 포퍼로부터 사상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복도에서 서로 마주쳐도 인사조차 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라카토슈는 수학의 증명과정이 누군가 멋진 생각을 해내고 그 생각에서 차근차근 연역적으로 코쉬 정리와 같은 놀라운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포퍼식의 추측과 반증을 통해 기존 증명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고쳐가면서 진보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포퍼의 반증주의 방법론을 수학에까지 확대 적용한 것이다. 라카토슈는 이 주장을 데카르트-오일러 추측 등에 대한 꼼꼼한 역사적 분석을 통해 논증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포퍼는 과학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긴 했지만 본격적인 과학사 연구를 과학철학과 접목시킨 적은 거의 없었다. 이 시기부터 이미 라카토슈는 충실한 포퍼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이탈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방법론의 영역에서 라카토슈는 포퍼의 반증주의가 실제이론평가에 합리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예를 들어 19세기에 천체물리학자들은 천왕성의 궤도가 뉴턴역학의 예측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뉴턴역학을 반증시키지 않았다. 대신 어떤 경험적 근거도 없이 새로운 행성인 해왕성을 천왕성 바깥에 설정하여 이 해왕성이 천왕성을 끌어당긴다고 설명하여 뉴턴역학을 ‘구제’했다. 이는 포퍼에 따르자면 비합리적인 이론수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행성의 발견과 뉴턴역학의 승리라는 과학적 진보의 주요한 사례가 된다. 물론 포퍼도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반증위기에 처한 이론을 수정할지의 여부는 방법론적 판단을 요구한다고 말한 바 있다. 꼼꼼한 역사적 분석으로 논증 그러나 문제는 이런 판단이 언제 정당한지를 결정하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천체물리학자들은 천왕성에 성공적이었던 방법을 똑같이 사용하여 수성의 근일점 이동을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수성 안쪽에 설정했던 벌칸이라는 새로운 행성은 발견되지 않았고, 실제로 수성근일점 이동은 뉴턴역학을 반증시켜야만 했던 사례였다. 그러므로 과학이론은 그것과 위배되는 경험적 증거가 나타날 때 단순히 반증시켜버릴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이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일종의 ‘시간’을 주어 볼 필요가 있다. 이 점에 대해 라카토슈는 쿤이나 파이어아벤트와 같은 목소리를 낸다. 라카토스의 특별한 점은 그가 이론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그 이론 자체가 아니라 그 이론이 역사적으로 어떤 양상을 띠며 발전해왔는지를 그 이론과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이론의 역사적 변화양상과 비교하여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론 A 자체가 아니라 이론 A에 이르는 여러 이론들의 계열을 다른 이론계열과 비교하자는 것이다. 이런 이론계열을 라카토슈는 ‘과학적 연구프로그램’이라 불렀고, 앞선 천왕성의 예처럼 단순히 기존 이론의 문제점만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현상을 설명하여 과학지식을 성장시키는 ‘발전적’ 연구프로그램과 플로지스톤 이론처럼 이론의 문제점을 임시방편 가설을 도입하여 피해나가는 ‘퇴보적’ 연구프로그램으로 엄격하게 구별했다. 이처럼 합리적 이론평가를 강조한 점에서 라카토슈는 쿤 및 파이어아벤트와 명확히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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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욱/한양대 교수·철학 dappled@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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