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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11 15:35 수정 : 2005.08.11 15:42

격동의 역사 숨쉬는 60년 책갈피

정진숙 회장 “종이도, 한글활자도 없어 조선말 큰사전 어렵게 펴내 책다운 책 내려면 무엇보다 고집 있어야” 강맑실 사장 “요즘엔 세상이 바뀌어 공들여 만든 책 적어요 정보 넘처나는 시대 책은 고급정보 가공해야”


한반도의 책들이 ‘식민의 언어’를 벗은 지 60년이다. 거기엔 책 만드는 출판사들이 맛본 희노애락 60년의 역사 또한 아로새겨져 있다.

한국 출판역사의 산 증인 정진숙(93) 을유문화사 회장을, 오늘의 중견출판인 강맑실(49) 사계절출판사 사장이 9일 아침 서울 종로 을유문화사 회장실에서 만나 ‘책과 책 만드는 사람들의 어제와 오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뜻밖에 두 사람은 ‘책의 인연’을 지니고 있었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이 그것이었다. 정 회장은 “(1948년) 6권까지 낸 <임꺽정>이 (작가 홍명희의 월북으로) 금서가 되는 바람에 더 못냈는데 어느날 <임꺽정>이 출간돼, 도대체 누가 냈나 봤더니 사계절이더라”며 아쉬움과 대견함을 나타냈고, 강 사장은 “책 다운 책을 내라는 정 회장의 출판정신이 지금 더 생생히 살아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맑실 1945년 을유문화사가 창립됐으니, 출판사 나이도 벌써 60이네요. 그 시절의 회장님 사진을 보니 참 잘 생기셨어요. 강한 의지가 얼굴에 뭍어나는 것 같았어요.

정진숙 시방은 못 생겼나? 그 때, 해방 전에 나는 은행에 다녔지. 거기 직원으로 있다가 해방이 됐어. 8월16일부터 은행에 나가질 않았어. 해방이 됐으니 밥이야 굶겠느냐 싶었고, 뜻있는 사업을 하자 생각도 했고. 일제한테 뺏긴 우리의 역사·문화와 언어를 다시 복구해야 한다, 그게 30~40년은 걸리겠다, 그런 걸 하려면 출판을 해야 겠다, 이렇게 결심하게 돼서 출판에 발을 들이게 됐지. (그는 창업동인 민병도·윤석중·조풍연과 함께 1945년 12월1일 을유문화사를 세웠다)

해방 직전엔 옥살이도 하셨던데요.

은행에서 섭외 일을 하다보니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게 내 업무였어. 그런데 중앙정보구 구실을 했던 용산헌병대가 그걸 이상하게 봤는지 불순분자라고 끌고가더니 재판에서 1년 선고까지 받고 수원형무소에 있다가 해방이 됐어. 은행 복직은 안 했지.


1945년 직후 해방 공간에선 누구나 사명감을 갖고 출판을 했을 것입니다. 1970년대에 독재정권 아래에서 사회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진보적 사회이념을 대중화하고자 출판에 뛰어들기도 했어요. 책을 통해 민족문화를 대중화하려 했던 해방 직후 출판인이나, 책을 통해 사회 대중에 진실을 알리려 했던 80년대 출판인들이나…, 일맥상통하는 점도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역사·문화·언어를 복구하려면 출판을 해야 했어. 우리가 일을 시작하고 책을 내자마자 여러 사람들이 좋은 일한다고, 애국하는 사업을 한다고 칭찬하고 좋아했어. 그때 막 <조선말 큰사전>을 냈어. 한글학자들이 원고를 들고서 두번이나 찾아와 30년간 고생해 만들었으니 출판해달라고 하는데, 그 땐 막막했어. 책 만들 종이가 어딨어? 인쇄소에도 한글활자가 제대로 없었고. 세번째 찾아와선 원고를 아예 내던져버리더라고. 그래서 한번 해봅시다, 했지. 시중에서 종이도 어렵게 조금조금씩 구해서 첫권이 나왔고, 우여곡절 끝에 1957년까지 6권을 냈네. 미군정 장교가 한글사전을 보더니 ‘이런 과학적인 문자·언어가 있는가’라고 놀라더라고. 나중엔 그게 인연이 돼서 록펠러재단 원조도 받았지.

출간하신 책들을 보면 쉽게 내기 어려운 책들이 많아요. 1970년대에 정 회장님이 쓴 글을 보니, 10년 걸려 책 내는 게 습관이 됐다고, 또 좋은 책을 공들여 만들어야 책도 오래간다고 말씀하셨어요. 요즘엔 세상이 바뀌었어요. 호흡이 긴 장기기획물을 만드는 사람들이 적어져 아쉬워요.

한국사 통사도 10년 걸려 7권으로 냈지. 두껍고 어려워도 젊은이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은 공들여 내려고 했지. 세계문학전집도 원서 중심으로 전문학자들을 참여시켜 시간이 걸리더라도 공들여 만들었고. 그때 경쟁이 붙었어. 다른 출판사들은 호텔에 방을 잡아놓고 저자들을 불러 졸속으로 책을 만들어내더라고. 호텔에서 벼락으로 책을 번역해 막 만들어내는 거야. 나는 도대체가 경쟁이 싫어. 출판이 무슨 경쟁할 건가? 직원과 저자들한테 나는 나대로 간다고 분명히 말했지. 남들이 먼저 낸다고 우리가 내던 책을 안 낼 수는 없고, 우린 경쟁을 생각하지 않고 한 달에 한 권꼴로 꾸준히 잡지 내듯이 냈어. 벼락치기로 책을 내던 출판사들은 두어권 내고는 나자빠지더군.

격동의 역사 숨쉬는 60년 책갈피
40, 50년대엔 정보를 책에서 얻으려는 욕구가 강했는데, 요즘은 책 아니어도 여기저기에 정보가 넘쳐나요. 그렇다보니 공들여 책을 만들려는 자세를 견지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는데, 요즘에 여전히 ‘호텔 방 벼락치기’ 식으로 책을 만드는 경우도 많아요.

근데 나는 처음부터 뜻이 달라. 너도 나도 하는 출판, 나는 그런 거 안 했어. 책 본위로 책을 만들려고 했지. 그게 내 고집이야. 지금은 출판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었지만, 우리 출판사는 계속 그래야 한다고, 남하고 경쟁할 생각 말고 책 본위로 출판하라고 늘 젊은 사람들한테 얘기해. 시대의 조류라, 가벼운 책을 영 만들지 말라고만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책을 제대로 만드시고 문화를 이끄는 책들을 내시니까 저절로 잘 팔리지 않던가요. 실제로 돈도 많이 버셨잖아요(웃음). 을유문화사의 창립 모토를 보니 “1.원고를 엄선하여 민족문화 향상에 기여하자, 2.교정을 엄밀히 하여 오식이 없도록 하자, 3.제품을 지성으로 하여 독자의 애호를 받자, 4.가격을 저렴히 하여 독자에게 봉사하자”고 했는데, 참 맘에 들어요. 출판 경쟁이 치열해진 요즘, 책으로 돈을 어떻게 벌까가 목적이 되면 안 되고 독자들이 읽고 싶어하는 책을 어떻게 만들까 하는 문제가 중요한 과제라 생각해요. 책이 이제는 고급정보, 또 실제 도움을 주는 정보로 가공돼야 한다는 출판의 책임감도 그만큼 커졌어요. 내용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담아내고 표현하는 형식까지를 포함한 기획의 차별화가 그 어느때보다 필요하지요.

솔직히 말해서, 출판 답게 출판을 하려면…무엇보다 고집이 있어야 해요. 시류 따라 이리저리 몰려가고 그런 건 안 돼 . 생명이 길지 않아.

해방 이후 처음으로 국내에 본격적인 문고판도 내셨죠. 독자의 편에 선 새로운 발상이면서, 우리 출판역사에서 보면 아주 혁명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먹고살 형편이 되는 사람들이 양옥 하나 짓고는 응접실에 책들을 장식용으로 죽 들여놓았지. 동대문에 가서 아무 책이나 한무더기를 사다가 장식용으로 쌓아둬. 보는 책이 아니야. 우리는 그런 짓 못하지. 책은 읽어야 하니까. 읽는 책으로 문고판을 내니까, 나중에는 문고판 책 하나쯤 들고다녀야 여대생 행세를 할 수 있게 됐어. 그러니 다른 출판사들도 너도나도 문고판 낸다고 붐이 일었지.

책의 양식은 시대를 말해주기도 해요. 방금 말씀하신대로 독자들이 정보를 갈구하는 시대에는 장식용이던 책은 실제로 읽을 수 있는 문고판으로 태어났고, 1970년대에 개발 정책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조금씩 풀리니까 책이 고급화하는 추세도 나타났어요. 문고판도 이제는 고급정보를 싼 값에 쉽게 읽는다는 애초 취지와는 달라져, 급변하는 세상에서 재빨리 세상의 여러 흐름을 해석해 압축된 정보를 전하는 문고판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어요. 요즘 책들 어떻게 보세요. 출판도 많이 발전했지요?

교보문고에 가서 보면, 안 나오는 책이 없더라고. 이렇게 많은 책이 나온다는 게 대견하고 신기하고, 그러면서도 읽고 내버리고, 휴지로 써도 되는 책들도 많은 것 같은 생각이야. 취미와 돈벌이 책들이 가지각색이야. 돈벌이 출판도 더러 있겠지만, 일부러 돈벌이를 위해 책을 낸다면야…안 돼. 그런데 <임꺽정>을 사계절에서 냈지요?

1985년에 9권으로 처음 나왔지요.

6·25사변 전(1948년)에 <임꺽정> 의형제편 3권, 화적편 3권을 냈어. 그런데 (홍명희 선생이 월북하는 바람에) 금서가 돼 더 내질 못했지. 나머지를 완간하려는데 낼 수가 없는 거야. 정부에 따지기도 했는데, 나중에 보니 <임꺽정>이 출간됐더라고. 누가 낸 거야? 보니 사계절이더라고. 출판 일은 어디에서 배웠는가?

회장님도, 책을 낼 때 마음에 들 때까지 정성을 다해 만드셨지요?

물론이지.

저도, 우연하게 출판을 하게 됐는데, 그런 정신을 잃지 않고 책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오늘 출판인들의 고민은 갈수록 커지고 있는 환경이지만, 우리 시대와 사회를 바르게 해석하고 독자를 위해 좋은 책을 만들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아무튼, 용해. 요즘 여자 출판사 사장들이 많아지고, 잘 해. 우리나라도 많이 발전했어.

고맙습니다. 오늘 뵙게 돼서 기뻤습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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