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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역사 숨쉬는 60년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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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숙 회장 “종이도, 한글활자도 없어 조선말 큰사전 어렵게 펴내 책다운 책 내려면 무엇보다 고집 있어야” 강맑실 사장 “요즘엔 세상이 바뀌어 공들여 만든 책 적어요 정보 넘처나는 시대 책은 고급정보 가공해야”
한반도의 책들이 ‘식민의 언어’를 벗은 지 60년이다. 거기엔 책 만드는 출판사들이 맛본 희노애락 60년의 역사 또한 아로새겨져 있다. 한국 출판역사의 산 증인 정진숙(93) 을유문화사 회장을, 오늘의 중견출판인 강맑실(49) 사계절출판사 사장이 9일 아침 서울 종로 을유문화사 회장실에서 만나 ‘책과 책 만드는 사람들의 어제와 오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뜻밖에 두 사람은 ‘책의 인연’을 지니고 있었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이 그것이었다. 정 회장은 “(1948년) 6권까지 낸 <임꺽정>이 (작가 홍명희의 월북으로) 금서가 되는 바람에 더 못냈는데 어느날 <임꺽정>이 출간돼, 도대체 누가 냈나 봤더니 사계절이더라”며 아쉬움과 대견함을 나타냈고, 강 사장은 “책 다운 책을 내라는 정 회장의 출판정신이 지금 더 생생히 살아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맑실 1945년 을유문화사가 창립됐으니, 출판사 나이도 벌써 60이네요. 그 시절의 회장님 사진을 보니 참 잘 생기셨어요. 강한 의지가 얼굴에 뭍어나는 것 같았어요. 정진숙 시방은 못 생겼나? 그 때, 해방 전에 나는 은행에 다녔지. 거기 직원으로 있다가 해방이 됐어. 8월16일부터 은행에 나가질 않았어. 해방이 됐으니 밥이야 굶겠느냐 싶었고, 뜻있는 사업을 하자 생각도 했고. 일제한테 뺏긴 우리의 역사·문화와 언어를 다시 복구해야 한다, 그게 30~40년은 걸리겠다, 그런 걸 하려면 출판을 해야 겠다, 이렇게 결심하게 돼서 출판에 발을 들이게 됐지. (그는 창업동인 민병도·윤석중·조풍연과 함께 1945년 12월1일 을유문화사를 세웠다) 강 해방 직전엔 옥살이도 하셨던데요. 정 은행에서 섭외 일을 하다보니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게 내 업무였어. 그런데 중앙정보구 구실을 했던 용산헌병대가 그걸 이상하게 봤는지 불순분자라고 끌고가더니 재판에서 1년 선고까지 받고 수원형무소에 있다가 해방이 됐어. 은행 복직은 안 했지.
강 1945년 직후 해방 공간에선 누구나 사명감을 갖고 출판을 했을 것입니다. 1970년대에 독재정권 아래에서 사회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진보적 사회이념을 대중화하고자 출판에 뛰어들기도 했어요. 책을 통해 민족문화를 대중화하려 했던 해방 직후 출판인이나, 책을 통해 사회 대중에 진실을 알리려 했던 80년대 출판인들이나…, 일맥상통하는 점도 있다고 생각해요. 정 우리 역사·문화·언어를 복구하려면 출판을 해야 했어. 우리가 일을 시작하고 책을 내자마자 여러 사람들이 좋은 일한다고, 애국하는 사업을 한다고 칭찬하고 좋아했어. 그때 막 <조선말 큰사전>을 냈어. 한글학자들이 원고를 들고서 두번이나 찾아와 30년간 고생해 만들었으니 출판해달라고 하는데, 그 땐 막막했어. 책 만들 종이가 어딨어? 인쇄소에도 한글활자가 제대로 없었고. 세번째 찾아와선 원고를 아예 내던져버리더라고. 그래서 한번 해봅시다, 했지. 시중에서 종이도 어렵게 조금조금씩 구해서 첫권이 나왔고, 우여곡절 끝에 1957년까지 6권을 냈네. 미군정 장교가 한글사전을 보더니 ‘이런 과학적인 문자·언어가 있는가’라고 놀라더라고. 나중엔 그게 인연이 돼서 록펠러재단 원조도 받았지. 강 출간하신 책들을 보면 쉽게 내기 어려운 책들이 많아요. 1970년대에 정 회장님이 쓴 글을 보니, 10년 걸려 책 내는 게 습관이 됐다고, 또 좋은 책을 공들여 만들어야 책도 오래간다고 말씀하셨어요. 요즘엔 세상이 바뀌었어요. 호흡이 긴 장기기획물을 만드는 사람들이 적어져 아쉬워요. 정 한국사 통사도 10년 걸려 7권으로 냈지. 두껍고 어려워도 젊은이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은 공들여 내려고 했지. 세계문학전집도 원서 중심으로 전문학자들을 참여시켜 시간이 걸리더라도 공들여 만들었고. 그때 경쟁이 붙었어. 다른 출판사들은 호텔에 방을 잡아놓고 저자들을 불러 졸속으로 책을 만들어내더라고. 호텔에서 벼락으로 책을 번역해 막 만들어내는 거야. 나는 도대체가 경쟁이 싫어. 출판이 무슨 경쟁할 건가? 직원과 저자들한테 나는 나대로 간다고 분명히 말했지. 남들이 먼저 낸다고 우리가 내던 책을 안 낼 수는 없고, 우린 경쟁을 생각하지 않고 한 달에 한 권꼴로 꾸준히 잡지 내듯이 냈어. 벼락치기로 책을 내던 출판사들은 두어권 내고는 나자빠지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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