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11 17:18
수정 : 2005.08.11 17:23
분단과 독재의 뿌리 찾기
해방전후사의 인식 1~6(송건호 외, 한길사, 1979~89)
분단, 독재, 종속적 경제 발전에 대한 비판의식은, 이런 현실이 가능하게 되었던 연원에 대한 관심을 촉발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었던 가능태가 어떤 이유로 오늘의 상황이라는 현실태로 굳어졌는지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그같은 열망을 학문적 차원에서 반영하면서, 그 열망을 더욱 대중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친일 반민족 세력의 실상과 통일 민족국가의 수립을 위한 다양한 움직임이 소상하게 밝혀졌다. 각별히 항일무쟁투쟁과 한국전쟁 직전까지의 북한사회도 다루어서 민족사 전체를 아우르고자 했다.
노동자 계급이 변혁 주체로 등장
노동의 새벽(박노해, 풀빛,1984)
1980년대는 민중문학의 시대였으며, 민중문학은 변혁운동의 전위였다. 상상력을 무기로 삼아 현실을 비판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가난하고 핍박받고 내쫒기고 눈물 흘리는 자들을 위해 문학은 모국어를 벼렸다. 박노해의 등장은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일대 사건이었다. 자본주의적 만행에 희생된 노동자들의 삶의 모습을 빼어나게 그려냈던 것이다. 기실, 우리 진보주의 문학운동은 <노동의 새벽>을 정점으로 그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다. 변혁의 주체로서 민중이라는 포괄적 개념이 노동자라는 계급으로 좁혀져 말하게 되는데도 기폭제 역할을 했다. 시의 시대를 맞이해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시집들이 밀리언셀러가 되는 거품이 일었지만, 그 거품에서 솟아난 ‘시의 아프로디테’는 <노동의 새벽>이었다.
오래된 금서에서 오래된 미래로
자본론 (칼 마르크스, 비봉출판사, 1987~1990)
따지고 보면,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1867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고전 <자본론>이 우리에게는 오랫동안 금서목록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주저는 강신준 번역의 <자본>(1987~1990)과 김수행 번역의 <자본론>(1989~1990)이 출간되면서 우리말로 다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사회민주화 덕분에 <자본론>을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어찌보면 그 불온성이 ‘유통기한’을 넘었기 때문에 세상에 나올 수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겨우 아무나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누구도 보지 않을 수도 있는 책으로 전락한 현상은 뜻있는 사람들을 씁쓸하게 만든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횡포 속에 마르크스라는 유령이 다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자본론>은 과연 ’오래된 미래‘일 수 있을까?
문화유산 ‘아는 만큼 보인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창작과비평사, 1993)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유행시키고 전 국토를 박물관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책이다. 실용서 중심의 출판시장에 인문서도 통한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고답적이고 권위적인 글쓰기에 대한 반성도 일으켰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많이 알고 있는 것을 자랑삼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독자들에게 전달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했다. 자동차 보유 대수가 늘어나고, 주말에 가족 단위로 여행을 하는 문화가 자리잡을 때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베스트셀러는 시대가 만든다는 통념을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90년대적 감수성의 정체 확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문학동네, 1996)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감수성과 문체를 요구한다. 1980년대를 상징하는 민중문학을 넘어서려는 문학적 도전이 90년대 들어 다양하게 펼쳐졌다. 미시적인 것과 내면성에 대한 예찬이 줄을 이었다. 남성작가에서 여성작가로, 시에서 소설로 문학의 주도권이 옮아갔다. 그러나 90년대적 감수성은 지극히 상업적인 논리와 쉽게 야합했다. 새로움은 상품성의 다른 말이었다. 가볍고 날렵하면서도 진중한 주제의식을 확보한, 진정한 의미의 90년대적 작가는 김영하이다. 서둘러 90년대적이라는 수사가 붙었던 작가들은 김영하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김영하의 등단작이면서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서 90년대적 감수성의 정체를 확인하게 된다. 2000년대 우리문학은 어떤 특징을 보이고 있을까. 과유불급이라 하더니, ‘90년대성’에 대한 경도가 한국문학의 위기를 불러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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