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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11 17:27 수정 : 2005.08.11 17:32

이권우 도서평론가

가야할 길이 분명해 행복했던 80년대 금기를 깨고 이념적 지평 넓혔다 90년대 개인의 욕망이 열쇳말 됐고 출판 중심추는 실용주의로 이동

1980~1999

하늘에 검은 장막이 펼쳐지면, 비로소 별들이 빛나게 마련이다. 칠흑 같은 어둠이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에서 비롯되었다면, 가야만 하는 길을 환히 밝혀주는 별은 책이었다. 그것은 시대가 출판에 요구한 ‘사명’이기도 했다. 신문과 방송은 통폐합이라는 홍역을 치러야 했고, 진보적인 지식인은 대학에서 쫓겨났다. 사회 전반에 공포의식이 퍼지고 검열이 강화되었다. 뭇 독재자들이 그러했듯, 비판의 목소리에 재갈을 물려놓은 것이다. ‘정규군’이 궤멸한 상황이라면, ‘게릴라’들이 나설 수밖에 없다. 1980년대 우리 출판은 시대정신에 충실했다.

‘문화운동으로서’ 출판은 금기를 과감하게 깨나갔다. 광주항쟁의 진상을 밝히고자 애를 썼으며, 미국의 정체를 까발렸다. 현대를 이해하기 위해 근대를 재해석했고, 북한을 바로 알고자 했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체제를 꿈꾸었으며, 그 동력으로 노동자를 지목했다. 마르크스의 <자본>과 <김일성 선집>의 출간이 이를 극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아, 놀라워라. 한권의 책 때문에 의식의 개종자들이 속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참으로 우리 지성사에 책의 힘을 이처럼 인상 깊게 보여준 적은 없었다. 출판과 사회의 관계는 역동성이 넘쳐났다. 다양한 사회운동의 결과가 출판에 영향을 미쳤다. 바야흐로 백가쟁명의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산이 높으면 골은 깊다고 했던가. 문화운동으로서 출판은 이념의 지평을 확대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열린 지평이 편향적이었다는 점은 한계로 반드시 지적되어야 한다. 80년대 한국 상황에는 충실했으나, 변화하는 세계 전체를 조감하는 능력은 부족했던 탓이다. 열정과 혈기가 앞선 나머지 산업기반을 튼실하게 다지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런 가운데 시류에 영합하는 책을 쏟아내 좌파 상업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어찌했든 80년대 우리 출판을 사로잡은 화두는 문화와 민중이었다.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행복한 시대였던 것이다.

1980년대 출판은 시대정신에 충실했다. ‘문화운동으로서’ 출판은 금기를 과감하게 깨나갔다. 광주항쟁의 진상을 밝히고자 애를 썼으며, 미국의 정체를 드러냈다. 북한을 바로 알고자 했고 이 땅의 노동자들에 눈을 돌렸다. 80년대 출판의 힘은 6월항쟁의 씨앗이 됐다. 사진은 고명진이 1987년 부산 문현동 로타리에서 촬영한 ‘아! 나의 조국’. <한국현대사진의 흐름: 1945-1994>(타임스페이스)에서.
시대가 바뀌었다. 지난 연대를 버티게 했던 믿음 가운데 여전히 유효했던 것은, 세상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정도였다. 국내에서는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국제사회에서는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했다. 거대담론으로 쌓아놓은 방파제가 무너지면서 포스터모던이라는 수식을 단 새로운 문화가 몰아쳐왔다. 그 새것은, 민중·역사·현실·사회과학·이념·계몽과 같은 ‘견고한 것들’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 예언했다. ‘역사의 종말’이 운위된 것이다.

90년대 우리 출판이 찾아낸 돌파구는 욕망이다. ‘벌목’된 민중이라는 그루터기에서 솟아난 줄기가 바로 개인의 욕망이었던 것이다. 마광수, 장정일의 필화야말로 90년대를 80년대와 나누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리하여 독서지형도에 일대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교양주의에서 실용주의로 바뀌었으니, 외국어·컴퓨터·실용서·경영서가 출판시장의 맹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출판이 이른바 속류화한 것만은 아니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우리 문화와 역사를 주제로 한 인문서들이 기획되면서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앞의 연대에 대한 반성과 동시대에 대한 성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현상이다.

90년대 들어 우리 출판은 산업이라는 낱말에 방점을 찍기 시작했다. ‘문화-운동’에서 ‘문화-산업’으로 변신한 것이다. 시장동향을 정확히 읽어낸 기획출판과 합리적인 방법에 기초한 마케팅에 승부를 걸었다. 그러나 출판인들의 염원과 달리, 우리 출판은 산업인프라의 취약성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전근대적인 유통구조가 끊임없이 발목을 잡았고, 도서관은 출판의 ‘지원군’이 되기에는 여전히 발걸음이 더디었다.


그렇다고 90년대의 출판이 문화의 기능을 등한히 했다는 말은 아니다. 어려운 가운데도 출판의 문화적 힘을 극대화한 깨어있는 출판인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우리 출판의 다양성과 건강성은 크게 훼손되었을 터이다. 시련이 잇따랐지만,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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