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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일본의 조선인식
나카쓰카 아키라 지음. 성해준 옮김. 청어람미디어 펴냄. 1만2000원 |
광개토대왕비 탁본 한장으로 촉발된 그들의 터무니없는 ‘선민의식’ 바뀐 세상 비웃듯 120년 동안 온전하고 오만의 눈짐작으로 잰 국보 석탑 높이조차 90여년 지나도록 오류 이어졌다니…
한국의 일부세력이 ‘수정주의’ 운운하며 비난해마지 않는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세계 식민주의 역사를 논하면서 일본의 조선지배의 특징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1910년에 이르기까지 독립된 자치 민족으로서 천 년의 역사를 지녔다. 일제 지배의 전 기간 동안 한국인은 한결같이 조선 내부의 배반자들과 손잡은 일본인들에 의해 민족의 독립을 빼앗겼다고 느꼈다. 이 때문에 스스로의 민족적 정체성이 식민지의 그늘에서 외롭게 창출되었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커밍스 교수의 말은 결국 한국(조선)은 1, 2차 세계대전 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대다수 신생국들처럼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비로소 민족적 정체성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그렇게 존재해왔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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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
이순우 지음. 하늘재 펴냄. 1만5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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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조선을 병탄하자 나라의 권위와 민족주의 정서의 상징인 경복궁 등 궁궐들에서 각종 대중행사를 열거나 아예 헐어냈고, 뜯어낸 건자재들을 자국으로 반출하기도 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유린하기 시작했다. 위 사진은 1923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부업품공진회 때 사이토 미노루 총독이 임금이 앉는 근정전 용상에서 포상식을 하는 장면. 아래 사진은 1929년에 열린 조선박람회 폐회식 때 근정전 용상에서 훈시하는 사이토.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 수록.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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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쓴 ‘한국사 바로잡기’ 주목할 것은, 나카쓰카 교수가 김석형·박시형 등의 북한 학자들과 강재언·강덕상·이진희·박경식·김의환·박종근 등 재일동포 사학자들 연구성과를 적극 수용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광개토대왕비 탁본해석의 오류와 한국사의 주체적인 전개에 대한 그의 새로운 인식전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런 사실을 접하면서, 광복 60년이 지나도록 도대체 이 나라 학자들은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왜곡되거나 잘못 알려진 우리 근대사 현장들 바로잡기에 초점을 맞춘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의 제5부 마지막 글은 충북 충주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탑(중앙탑) 얘기다. ‘중원탑평리칠층석탑’이 정식명칭인 이 탑은 국보 6호다. 그런데 지난해 정밀실측작업을 한 결과 정확한 높이가 12.95m였다. 그런데 이 탑의 높이는 그때까지 줄곧 14.5m로 표기돼 왔고, 그 근거가 ‘조선고적조사의 독보적 존재’로 어마어마한 권위를 인정받았던 세키노 다다시라는 일본 건축가의 ‘목측기록’이다. 무려 90년도 더 전인 1912년 11월에 그가 잠깐 둘러보고 눈짐작으로 ‘약 48척’이라고 적어놓은 것을 인용에 재인용을 거듭하다가 어느새 ‘약’자는 빼버리고 이를 다시 미터법으로 환산해 그냥 써온 것이라고 저자 이순우는 확인한다. 국보조차 이랬다. 세키노는 그 전인 1902년 35살 새파란 나이의 도쿄제국대 조교수 신분으로 약 두달간 조선을 수박 겉핥기로 둘러보고 <한국건축조사보고>라는 책을 냈는데 이게 조선미술사의 뼈대가 됐단다. 그 책은 ‘졸악’이니 ‘조졸’이니 ‘졸렬’, ‘볼 것이 없다’는 구절이 예사로 등장하는, “(조선미술에 대한) 편견과 오류와 폄훼 일색”이란다. 세키노가 나중에는 생각을 좀 바꿨다지만, 1세기가 다돼가도록 제국주의 식민사관 신봉자들 오류 내지 날조 하나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는 이땅의 꼬락서니를 보건대, 일본의 한국 능멸이 어찌 일본인들 탓이기만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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