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8.11 18:29 수정 : 2005.08.12 13:56

근대일본의 조선인식
나카쓰카 아키라 지음. 성해준 옮김. 청어람미디어 펴냄. 1만2000원

광개토대왕비 탁본 한장으로 촉발된 그들의 터무니없는 ‘선민의식’ 바뀐 세상 비웃듯 120년 동안 온전하고 오만의 눈짐작으로 잰 국보 석탑 높이조차 90여년 지나도록 오류 이어졌다니…

한국의 일부세력이 ‘수정주의’ 운운하며 비난해마지 않는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세계 식민주의 역사를 논하면서 일본의 조선지배의 특징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1910년에 이르기까지 독립된 자치 민족으로서 천 년의 역사를 지녔다. 일제 지배의 전 기간 동안 한국인은 한결같이 조선 내부의 배반자들과 손잡은 일본인들에 의해 민족의 독립을 빼앗겼다고 느꼈다. 이 때문에 스스로의 민족적 정체성이 식민지의 그늘에서 외롭게 창출되었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커밍스 교수의 말은 결국 한국(조선)은 1, 2차 세계대전 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대다수 신생국들처럼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비로소 민족적 정체성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그렇게 존재해왔다는 얘기다.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
이순우 지음. 하늘재 펴냄. 1만5000원
1993년에 <근대일본의 조선인식>을 쓴 나카쓰카 아키라 교수가 굳이 이런 커밍스의 얘기를 인용하면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한 것은 대다수 일본국민들이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우익국수주의자들 조직인 ‘새 역사를 만드는 모임’의 후소사판 일본 역사교과서를 상기해 보라. 일본인들 대다수는 한국인은 원래 독립국가를 형성하고 유지할 자주성과 역량이 결여된 민족이고, 그것은 4세기 중반에서 6세기에 걸쳐 일본이 미마나(임나일본부)를 통해 조선 남부지역을 지배한 사실로도 입증되며, 한반도의 역할이란 오로지 대륙과 또다른 동아시아 역사의 중심이자 전파자인 일본을 연결해주는 통로로서만 존재의의가 있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16세기 임진왜란도 정당하고, 19세기 말에 조선을 그대로 두어서는 중국이나 러시아의 속국이 돼 일본을 찌르는 비수가 될 것이니 일본이 서둘러 지배할 수밖에 없었다는 둥, 조선의 생산력은 일본에 비해 애초부터 비교가 안될 정도로 낙후돼 있었다는 가설 위에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둥, 심지어 고대 고구려를 근대 러시아제국에 비견하면서 일본의 생존을 위해 백제·신라를 복속하고 고구려와 한반도 쟁탈전을 벌였듯이 러시아와도 결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는 둥의 유치한 거짓말을 했고, 유감스럽게도 지금도 그런 시각은 별로 바뀐 게 없다. 물론 이런 주장들은 사실이 아닌 완전한 날조에 가깝다.

그럼에도 한국의 수구우익은 커밍스에 대한 비난이 사실상 이들 일본 우익국수주의자들 사관에 동조하는 것과 진배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식민지배가 은혜였다던 한승조의 예는 결코 우발적인 게 아니다.

일제는 조선을 병탄하자 나라의 권위와 민족주의 정서의 상징인 경복궁 등 궁궐들에서 각종 대중행사를 열거나 아예 헐어냈고, 뜯어낸 건자재들을 자국으로 반출하기도 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유린하기 시작했다. 위 사진은 1923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부업품공진회 때 사이토 미노루 총독이 임금이 앉는 근정전 용상에서 포상식을 하는 장면. 아래 사진은 1929년에 열린 조선박람회 폐회식 때 근정전 용상에서 훈시하는 사이토.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 수록.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에서
제2, 제3의 한승조 안나올까

그런데, 일본의 ‘탈아입구론’이니 ‘정한론’ 등 아시아침략으로 이어진 일본 선민의식의 토대는 의외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일본군 참모본부의 중국 파견 스파이 사코 가게노부 포병대위가 1884년 만주 지안에서 손에 넣어 일본에 갖고 간 광개토대왕비 탁본 한장이 거의 전부다. 청일전쟁을 준비중이던 일본 군부가 내밀하게 갖다붙인 견강부회식 탁본 해석이 몰고온 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일부 글자들이 멸실되거나 해독불능이 된 비문의 극히 일부분만의 해석의 기댄 일본쪽 주장은 잘 알려져 있듯이 왜가 백제·신라·가야를 쳐부수고 고구려와 격렬히 싸우며 평양까지 쳐들어가기도 했다는 식이다. 이런 류의 해석은 7세기에야 만들어진 <일본서기> <고사기> 류의 ‘만세일계 천황’ 지배 신화와 뒤섞이고 정한론자들의 정치적 야망과 뒤얽혀 의문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사실’로 둔갑했다. 조선지배 욕망에 눈이 먼 정치가나 군부, 꼭같은 민족주의 열망에 사로잡혔던 역사가들의 ‘확신’이 됐고 급기야 ‘국민적 상식’이 됐다.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살아있는 “일본은 (고대부터) 언제나 조선에 앞섰다”는 신화와 관념은 바로 120년 전인 1884년 직후에 ‘만들어진 것’이며, 놀랍게도 엄청난 세상 변화와 학문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형은 전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온존돼왔다. 어떻게해서?

나카쓰카 교수는 바로 그 의문을 추적해서 사실을 까발린다. 광개토대왕비문의 진실만이 아니라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당시의 의병전쟁, 식민지배 시절의 3·1운동과 노동자·농민 투쟁, 항일무장투쟁 등 의도적으로 무시돼온 한국의 자주적 움직임도 부각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일본 근현대사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본다.


일본인이 쓴 ‘한국사 바로잡기’

주목할 것은, 나카쓰카 교수가 김석형·박시형 등의 북한 학자들과 강재언·강덕상·이진희·박경식·김의환·박종근 등 재일동포 사학자들 연구성과를 적극 수용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광개토대왕비 탁본해석의 오류와 한국사의 주체적인 전개에 대한 그의 새로운 인식전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런 사실을 접하면서, 광복 60년이 지나도록 도대체 이 나라 학자들은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왜곡되거나 잘못 알려진 우리 근대사 현장들 바로잡기에 초점을 맞춘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의 제5부 마지막 글은 충북 충주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탑(중앙탑) 얘기다. ‘중원탑평리칠층석탑’이 정식명칭인 이 탑은 국보 6호다. 그런데 지난해 정밀실측작업을 한 결과 정확한 높이가 12.95m였다. 그런데 이 탑의 높이는 그때까지 줄곧 14.5m로 표기돼 왔고, 그 근거가 ‘조선고적조사의 독보적 존재’로 어마어마한 권위를 인정받았던 세키노 다다시라는 일본 건축가의 ‘목측기록’이다. 무려 90년도 더 전인 1912년 11월에 그가 잠깐 둘러보고 눈짐작으로 ‘약 48척’이라고 적어놓은 것을 인용에 재인용을 거듭하다가 어느새 ‘약’자는 빼버리고 이를 다시 미터법으로 환산해 그냥 써온 것이라고 저자 이순우는 확인한다. 국보조차 이랬다. 세키노는 그 전인 1902년 35살 새파란 나이의 도쿄제국대 조교수 신분으로 약 두달간 조선을 수박 겉핥기로 둘러보고 <한국건축조사보고>라는 책을 냈는데 이게 조선미술사의 뼈대가 됐단다. 그 책은 ‘졸악’이니 ‘조졸’이니 ‘졸렬’, ‘볼 것이 없다’는 구절이 예사로 등장하는, “(조선미술에 대한) 편견과 오류와 폄훼 일색”이란다. 세키노가 나중에는 생각을 좀 바꿨다지만, 1세기가 다돼가도록 제국주의 식민사관 신봉자들 오류 내지 날조 하나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는 이땅의 꼬락서니를 보건대, 일본의 한국 능멸이 어찌 일본인들 탓이기만 하랴.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