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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11 19:06 수정 : 2005.08.11 19:14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주강현 지음. 웅진 지식하우스 펴냄. 1만8000원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 독도와 울릉도를 지키려던 김한경, 안용복 등은 슬픈 최후를 맞았다 일본은 이와 대조되게 바다를 통해 적극적으로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대체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민속학자로서 해양문화에 큰 관심을 지니고 천착하고 있는 재야 연구자 주강현씨가 ‘해양사’의 관점에서 한반도와 주변 지역의 역사를 조감한 저서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를 내놓았다. 독도와 진해, 거문도에서부터 일본의 다네가시마와 가고시마, 나가사키, 그리고 남태평양 팔라우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등에 이르기까지 지은이의 고단했을 발품이 짐작되는 책이다.

5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을 통해 지은이 주씨가 역설하는 것은 한마디로 ‘바다로 눈을 돌리자’는 것이다. 8·15를 앞두고 나온 이 책은 특히 독도를 둘러싼 한·일 외교분쟁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지은이는 독도 문제를 올바로 보기 위해서도 땅의 관점만이 아닌 바다의 관점을 동원해야 함을 역설한다. 프롤로그의 첫 문장들이다.

 “독도 문제를 제대로 읕하고 제대로 대처하자면 ‘육지사’ 중심의 빈약한 사고로는 안 된다. 세계사적 규모에서의 해양사적 읕 없이는 독도 문제를 읕할 수 없다.”

독도문제 풀려면 해양사 인식해야

 그러나 우리는 어떠했던가. 책의 첫 장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리 산 1-37번지에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 독도를 지키려 애썼던 세 사람의 슬픈 최후가 바다에 관한 우리네의 그릇된 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선 <성종실록>에는 당시 ‘삼봉도’로 불린 울릉도를 여러 차례 다녀와서 그 실체를 잘 알고 있었던 김한경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그의 딸을 노비로 삼도록 했다는 것이다. 성종은 김한경을 앞세워 삼봉도 탐사에 나서려 했으나 위험한 바닷길 모험에 나서기 싫었던 양반관료들은 김한경을 있지도 않은 섬이 있다고 주장하는 거짓말쟁이로 몰아 극형에 처하고 그 딸마저 노비로 삼았던 것이다.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확인받은 ‘영웅’ 안용복은 ‘제멋대로 국경을 이탈하고 외교 문제에 개입한 월권’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유배를 가는 것으로 사건이 종결되었다. 한국전쟁의 혼란기에 자발적으로 의용수비대를 조직해 일본 해경과 10여 차례 전투를 치르며 독도를 사수한 홍순칠 대장 등 33명의 대원들은 나라에서 아무런 보상이나 예우도 받지 못했다.


해양의 가치와 비중에 관한 우리 쪽의 무지와는 대조되게 일본은 일찍부터 바다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바다를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과 이웃한 우리에게 대체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1543년 8월 25일 일본 규슈의 최남단 가고시마 앞 섬 다네가시마에 상륙한 남만국() 장사꾼들에게서 입수한 총을 고스란히 복제해 반세기 뒤 임진왜란에서 효과적으로 써 먹은 것이 일본이었다. 남양군도라 불린 미크로네시아의 팔라우를 일본이 차지한 것도 태평양전쟁 시기가 아니라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전리품으로 신탁통치를 위임받으면서부터였다. 숱한 조선의 젊은 남녀들이 전장의 총알받이와 병사들의 정액받이로 끌려갔던 곳이 바로 팔라우 등 남양군도이기도 했다.

우리의 바다를 노린 것이 일본만도 아니었다. 1885년 4월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한다는 구실 아래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무단 점령한 이른바 ‘거문도 사건’은 세계 열강들이 한반도에서 벌인 각축전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리고 이 각축은 19세기 말에 들어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15세기 대항해시대 이후 전세계의 바다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제국과 식민의 각축’의 하나였다는 것이 지은이의 관점이다.

바다 둘러싼 제국과 식민의 각축

지은이는 규슈 최남단 가고시마의 레이메이칸()에 걸린 그림 <정한의논도()>(사진)를 보면서도 섬찟한 느낌과 함께 “바다를 통한 해양교류의 지름길을 일찍이 깨닫고 실천한 변방 사람들의 선진적 해양관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힌다. “정한론의 귀결점으로 끝내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것에 대해서는 엄중한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촌구석이었음에도 일찍이 바다로 열려진 창구를 이용하여 힘을 키우고 그 힘으로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되었으니 바다를 통한 힘의 축적 과정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해라는 도시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사를 집약해서 간직하고 있는 상징적 공간이다. 진해는 부산포와 울산 염포와 더불어 조선 초에 왜인들에게 열린 ‘삼포’ 가운데 하나였다. 왜인들은 지금의 진해시 웅천동 괴정마을에 토성을 쌓고 근처에 왜관을 설치해 무역과 외교 용도로 사용했다. 그러나 왜구를 순치시키겠다는 의도로 설치된 삼포는 왜인들이 걷잡을 수 없게 늘어나면서 조정의 또 다른 골치거리가 되었다. 이에 따라 중종대에는 삼포 왜인들에 대한 억제책을 택했는데 이에 반발한 왜인들이 쓰시마와 연계해 일으킨 것이 바로 1510년 4월의 삼포왜란이었다.

 그 진해가 일제강점기에는 ‘욱일승천기’를 닮은 방사형 계획도시로 개발되면서 ‘진해’라는 지금의 이름을 얻었고, 대일본제국 조선주차군 해군사령부가 들어섰다. 진해가 전국 제일의 벚꽃 명승지가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 진해에 지금은 대한민국 해군사령부와 해군사관학교가 있고 시내 곳곳에 충무공 이순신의 동상이 서 있다. “일장기 도로와 이순신, 그 야릇한 이중창이 묘한 느낌을 준다.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벚꽃이 휘날리는 풍경 속에 충무공 동상이 서 있다.” 정말 야릇하다.

사진 웅진 지식하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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