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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11 20:07 수정 : 2005.08.11 20:13

장석남 다섯번째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청년기 데뷔작 ‘김수영 문학상’ 중년 돼서야 김수영풍 변모 “혁명이 없으니 추락을 낳았지” ‘폭포’와 같은 시 다시 쓰고 ‘방을 깨다’는 체념과 자조 비슷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으로 1992년도 김수영문학상을 받았을 때 장석남씨의 나이는 만으로 스물일곱이었다. 90년대 ‘신서정’의 기수로 꼽히는 장씨의 수상 시집은 물론 빼어난 성과물이었지만 ‘김수영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참여적이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조와 어조에 있어서 김수영의 시와는 판이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최근에 내놓은 다섯 번째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에서 그의 노래가 뒤늦게(?) ‘김수영풍’으로 변모한 것은 흥미롭다. 그가 13년 전의 수상을 마음의 빚으로 간직해 온 것은 아닐 테다. 이십대 후반의 청년을 마흔 살의 중년으로 바꾸어 놓은 세월의 손길에 그 비밀이 있을 터.

 “둥글게 둥글게 살자는 명상도 옳긴 하지만 내 시를 보고/너무 이른 나이에 둥그렇게 되었다는 말도 옳아서/밤새도록 이 꺾인 고궁의 돌담 아래 앉아 있어 보는 것이다”(<내면으로>)

 “내게 정자가 하나 있다 무엇보다/여편네와 싸워 이긴 거지만/전위를 말하는 촌스런 시들로부터/현학의 무지한 시들로부터/정치를 외면한 가여운 은일로부터 싸워 이긴/빛나는 승리다”(<정자() 1>)

인용한 두 편의 시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 세계에 닥쳐 온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젊은 연배에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원숙하다는 지적에 대한 수긍, 그리고 전위와 현학과 정치 외면의 조류를 상대로 한 싸움이 지금의 그의 시를 빚어 놓았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계단을 오르내리며/오르고 내리는 것의 섭리를 생각한다/국제 정세와 남북경협을 생각하기도 한다 위대한 진리인 미국을 생각하고 죽었다 깨어나도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굴복하는 방법에 대해서, 끽 소리 나지 않게 우아하게 굴복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목숨은 그래도 끝까지 부지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찍 소리 나지 않게 나를 단속하고 간혹은 딴청을 부려야 한다는 기교까지 생각한다”(<옛 친구들>)

언어의 섬세한 조탁이니 형식적 긴장이니 하는 것들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채 편하게 내뱉는 듯한 말투가 이전의 장석남 시와는 확실히 다르다. 느슨해졌다기보다는 편해졌다는 느낌이다. 때때로 유머러스한 상황과 언어를 구사할 정도로 여유도 생겼다. 형식상의 변모는 소재와 내용에서의 변화와 나란히 간다. 지난 시집들에서 고향 덕적도의 자연과 유년의 기억을 소중히 어루만졌던 그가 이번 시집에서는 고향의 존재를 아예 잊기라도 한 양 현재의 비루한 일상에 집중하는 모습도 이채롭다.


형식적 긴장 풀고 편해져

 “삼선시장 순댓국밥집의 길거리로 낸/주방의 진보,/쓰레기통의 악취를 덮어놓는/신문지의 진보,/돼지 대가리의 코를 베고 귀때기를 베고 혀를 잘라서 국밥에 넣듯이/나아가는 맛,/시치고는 참으로 진부한/이 나아가는 맛,”(<나아가는 맛>)

 “그러나 나는 좀 근사한 도둑이라도 되어서/물욕을 버리고 싶지 않고/성욕을 버리고 싶지 않고/정치를 버리고 싶지 않다/무엇보다 너를 버리고 싶지 않다”(<이명()을 따라서>)

물론 시인이 자신의 지나친(?) 여유와 편안을 경계하는 시편들도 없지는 않다. 시집의 맨 앞에 배치된 <얼룩에 대하여>의 말미에서 “얼룩이 남지 않도록/맑게/울어 얼굴에 얼룩을 만드는 이 없도록/맑게/노래를 부르다 가야 하리”라고 다짐하거나 <치졸당기()>라는 재미나는 제목의 시를 “멀리서 호오이 호오이 밤새가 운다. 저것이 비명이란 것도 모르고 나는 잠을 자고 있었구나”라는 자책의 말로 마무리하는 것은 시인 내부의 ‘야당’의 목소리라 할 만하다.

장석남
 그렇지만 역시 <치졸당기>의 다른 대목에서 “그러나 그 치졸을 나는 즐기련다”고 선언하거나 <산기슭에서>라는 제목의 시에서 “뗑그렁 뗑그렁/명당의 이 심드렁이 나는/좋구나”라며 짐짓 퍼져 보일 때 시인은 역시, 다소 무책임할 수 있는 대로, 중년의 여유를 선호한댄 보아야 옳을 것이다.

시인이 중년다운 뻔뻔함(?)을 노골적으로 과시한 시가 <목돈>이다.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로 시작되는 이 시에서 시인은 그 300만 원을 어떻게 쓸지 ‘잔머리’를 굴리는 자신의 모습을 짐짓 해학적으로 묘사한다.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 같은 이 300만 원을” 애지중지 모시고 다니는 시인의 ‘속물적’ 면모는 독자로 하여금 긴장과 경계를 풀고 빙긋이 웃음을 깨물게 만든다.

 “이 측은이 나의 적은 아닌가/적은 아닌가/거창한 장애는 아닌가//(…)/이 간단이 나의 적은 아닌가/죄는 아닌가”(<측은을 대하고>)

 “왜 나의 적은 이토록 매번 작은가?/붙잡을 수도 없이 작고 작은가?/동시에 또 하나의 적이 나타난다//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싸움은 거룩한 것인가?/작고 작은 싸움, 좁쌀만 한 싸움/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나의 정직은 서글프다”(<창을 내면 적이 나타난다>)

인용한 시들에는 김수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아예 김수영의 시 <폭포>를 받아서 자기 식으로 다시 쓴, 같은 <폭포>라는 제목의 시도 있다.

 “혁명이 없으니 추락을 낳았지/또렷한 정신이 없으니 급박한 낙하를 낳았지/사랑이지 사랑이지/마지막 사랑을 낳았지//나는 폭포를 사랑하고/폭포보다는/폭포를 사랑한 이유를 더 사랑하고/그보다는 다시/폭포를, 폭포를 더더욱 사랑하고/절벽을 사랑하고/절벽 위의 절벽을 사랑하고/사랑의 낙차를/더 더 사랑하고”(<폭포>)

“치졸 즐기련다” 중년 뻔뻔함도

좀 더 교묘한 김수영의 흔적도 있다. <내일도 마당을 깨겠다>와 <계단 옮기기>라는 시, 무엇보다 <방을 깨다>라는 제목의 시는 어딘지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는 김수영의 시 <그 방을 생각하며>를 떠오르게 하지 않는가. 자조와 체념 속에 어쩐지 편안함이 느껴지는 김수영 시의 분위기가 <방을 깨다>에서 흡사하게 되풀이되는 것을 보라.

 “그 참담이 한꺼번에 고요히 낡은 깨달음의 화두가 되려 한다는, 사랑도, 꿈도, 섹스도, 온갖 소문과 모함과 죽음, 저주까지도 너무 쉽게, 무엇보다 나의 거창한 무지까지도 너무 쉽게 깨달음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나의 비참은,//(…)//아직도 먼 봄, 이미 아프다/나의 방은 그 봄을 닮았다/나의 비참은 그토록 황홀하다”(<방을 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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