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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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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봉의 문학산책
영국의 여성 작가 마거릿 드래블(66)의 소설 <붉은 왕세자빈>(원제 The Red Queen; 전경자 옮김, 문학사상사)은 흥미로운 사례다. 이 작품이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회고록 <한중록>을 모티브 삼아 쓰여졌기 때문이다. 마거릿 드래블은 2000년 가을 제1회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하느라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가 귀국한 뒤 대영박물관에서 일하는 한 학자의 권유로 영역본 <한중록>을 읽게 되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한중록>은 드래블을 압도했다. ‘세계문학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작품이 세계문학’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드래블은 말한다. 결국 그는 <한중록>을 소재로 새로운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했고 그 결심을 실천에 옮겼다. <붉은 왕세자빈>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붉은 왕세자빈>은 3부작 장편소설이다. 제1부는 혜경궁 홍씨의 유령이 1인칭으로 자신의 한스러운 삶을 돌이켜 보는 내용이다. 마거릿 드래블이 다시 쓴 <한중록>이라 할 법하다. “나는 종이와 비단의 세상에서 왔다. 밤에는 초롱불로 어둠을 밝혔고 호수에다 비단 돛을 단 종이배를 띄우고 놀았다.(…) 대궐의 담 안은 조용하고 난폭하고 냉엄하고 은밀한 나라였다.”(195쪽) 2부는 명문 옥스퍼드대 출신의 의학윤리 전공 여성 학자 바버라 할리웰을 주인공 삼아 3인칭으로 진행된다. 바버라가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한중록>을 읽고 18세기 조선에서 일어난 사도세자의 비극에 공감하는 내용이 큰 얼개를 이룬다. 바버라 자신 능력이 있음에도 남성들이 지배하는 옥스퍼드대에 교수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으며, 남편은 억압적인 부친과의 갈등으로 인해 생긴 정신병으로 고통받고 있고, 아들은 유전병으로 먼저 세상을 떴다. 짧은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마지막 3부는 서울에 머무는 동안 세계적 지성 얀 반 요스트와 짧은 사랑을 나누고 그의 죽음이라는 강렬한 경험을 한 바버라가 영국으로 돌아와 얀의 아내와 함께 중국인 소녀를 입양해 키우기로 한다는 줄거리를 지니고 있다. 소설의 말미에는 흥미롭게도 “마거릿 드래블이라는 소설가”가 등장해 바버라와 얀의 아내 폴리의 새 친구가 된다. 바버라는 마거릿 드래블에게 <한중록>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고는 “왕세자빈으로 하여금 새로운 여주인을 야금야금 갉아먹도록 하자”(400쪽)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난해 이 소설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특히 미국의 한국학계 쪽 반응은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다. 드래블이 지난달 25일 영국 신문 <더 타임스>의 문예 부록 ‘리터러리 서플리먼트(literary supplement)’에 기고한 ‘오직 옳아야(Only Correct)’라는 제목의 이 글에 따르면 이 작품에는 오리엔탈리즘, 문화적 전유(), 무지, 냉소, 표절 등의 비난이 퍼부어졌다. 물론 드래블은 그에 대해 강한 어조로 반박하고 있다. 그는 가령 온돌을 목재로 묘사했다든가 혜경궁 홍씨가 프로이트나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를 읽었을 것으로 상정한 것은 분명 잘못이었음을 시인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조선의 옛 기록을 ‘훔쳐서’ 소설로 써 먹었다는 식의 비난에는 동의할 수 없노라고 밝힌다(<붉은 왕세자빈> 속에서 ‘마거릿 드래블’은 새로 사귄 친구 바버라와 폴리에게 “소설가는 훔치고 차용하고 도용합니다. 비밀로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건 절대로 소설가에게 털어놓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농담 삼아 경고한다). “이야기들이란 원하는 대로 옮겨 다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지난 5월 서울에서 열린 제2회 국제문학포럼에서 그는 영국 소설가 포스터(E. M. Forster)의 “다만 연결하라(Only connect)”는 말을 화두로 삼아 발표를 한 바 있다. ‘연결(connect)’의 다문화적 의도가 ‘올바름(correct)’을 둘러싼 저급한 논쟁으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이 드래블의 안타까운 문제의식이다. “전유 또는 침략이라는 비난이 없이 연결하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기고문의 맺음말에 그런 취지가 담겨 있다.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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