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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11 20:34 수정 : 2005.08.11 20:43

1990년에 그가 좋아하는 남아메리카산 침독개미를 본떠 만든 금속조각상 ‘데이시’앞에 앉아 있는 윌슨.

동물 본성의 연속성에서 인간 본성 파악 좌파로부터 ‘인종차별주의자’로 비판받아 개미전문가-사회생물학자-통섭전도사 변신 계몽주의 꿈 되살린 21세기 르네상스인 생태학·환경 정책 분야 독특한 영향 끼쳐

과학속 사상, 사상속 과학/ ⑬ 에드워드 윌슨과 사회생물학

“인종차별주의자, 당신은 글렀어.” 1978년 미국과학진흥협회 연례 회의장에서는 연단을 점거한 국제 인종차별 반대위원회 회원들의 구호가 들려왔다. 이윽고 한 여성이 주전자를 들더니만 강연을 막 시작하려는 연사의 머리 위로 물을 붓는 게 아닌가! 이 전대미문의 봉변을 당한 피해자는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의 창시자로 알려진 에드워드 윌슨(E. O. Wilson)이다. 당시 그는 지천명을 코앞에 둔 하버드대학의 저명한 동물행동학 교수였다.

이 사건의 원인 제공자는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1975)이다. 앨라배마대학을 졸업한 뒤 박사학위를 위해 하버드대학으로 옮긴 촌뜨기 윌슨은, 1950년대에 개미의 페로몬 연구로 학위를 받았고 좋은 평가 속에서 하버드대학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했다. 개미를 비롯한 몇몇 동물들의 사회구조에 매료된 그는 <사회생물학>에서 새, 사자, 원숭이, 유인원 그리고 인간의 사회행동을 동일한 시각에서 분석했다. 곧, 수많은 동물들의 번식 행동, 서열 행동, 협동 행동, 카스트 체계 등을 개체나 집단이 아닌 유전자의 눈높이에서 일관성 있게 설명하고자 했다. 이렇게 사회생물학은 동물의 모든 사회행동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야심찬 기획이었다.

무모하게 인간을 다룬 게 화근이었나? 사실 <사회생물학>은 26장까지 인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600쪽에 육박하는 전체 분량의 5%에 불과한 마지막 27장에서만 인간의 행동과 문화를 다뤘을 뿐이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한 거의 모든 비난과 찬사가 동시에 그곳을 향해 있다. 실제로 27장 때문에 윌슨은 물세례의 수모도 당했지만 <타임>과 <뉴욕타임스>의 표지기사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물론,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윌슨이 처음일 수 없다. 20세기만 보더라도 스키너로 대표되는 행동주의 전통에서는 인간의 행동이 ‘자극과 반응, 그리고 강화’라는 단순 메커니즘으로 설명됐다. 하지만 윌슨은 “심리학이 새로운 토대 위에 세워질 것”이라고 예견한 다윈의 진화론적 전통 위에 서 있었고 몇몇 탁월한 이론가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일벌의 이타적 행동(불임)의 진화를 수학적으로 풀어낸 런던대학의 해밀턴과, 비혈연 집단에서의 협동을 설명하고 가족 구성원 간의 충돌을 유전자 관점에서 해석한 하버드대학의 트리버스가 그들이다. 윌슨의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해밀턴의 혈연선택론이 가지는 중요성을 학계에 소개한 일이다. 독창성 측면에서 윌슨은 이 두 천재 이론가들의 하수이다.

하지만 과학은 천재들만의 잔치는 아니다. 대신 윌슨은 종합의 달인이다. <사회생물학>에서 그는 동물에 관한 산발적 지식들을 몇 가지 원리로 통합해 새로운 종합을 일궈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위해서 이른바 ‘외계 생물학자의 관점’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 관점에서 인간은 또 다른 생물종일 뿐이며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생물학의 특수 분과들로 축소된다.”

인간의 본성을 동물 본성의 연속선상에서 보려는 이런 시도는, 본능보다는 학습 혹은 환경을 중시했던 좌파계열의 지식인들에게 하나의 도발이었다. 보스턴지역의 몇몇 지식인들은 ‘사회생물학 연구회’를 결성해 윌슨의 사회생물학이 근거도 없고 정치적으로도 위험하다는 논평들을 공개적으로 게재하기 시작했다. 탁월한 집단유전학자 르원틴과 고생물학자 굴드는 바로 그 모임의 주축 세력이었다. 두 사람은 신좌파 계열의 생물학과 교수로서 윌슨과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는 동료였다. 베트남전 직후의 정치 상황에 민감하지 못했던 윌슨으로서는 영문도 모르고 당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런 비판은 정치적으로 순진(무식?)했던 그에게 결과적으로 사회과학을 제대로 공부하게끔 만든 계기였다.


강연중 물벼락 봉변도

사회생물학 연구회가 <뉴욕 서평지>를 통해 윌슨을 유전자 결정론자로 몰아붙인 사건이 있은 지 2년 뒤, 윌슨은 인간 연구에 전념하여 보란 듯이 <인간 본성에 관하여>(1979)를 출판했다. 게다가 이 책은 논픽션 부문에서 퓰리처상까지 받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를 본격적으로 탐구한 <유전자, 마음, 그리고 문화>(1981), <프로메테우스의 불>(1983)을 젊은 이론물리학자 럼스덴과 함께 작업했다. 이 저작들에 등장하는 핵심 용어인 ‘후성 규칙’은 인지 발달의 편향된 신경 회로를 뜻한다. 유전자는 이 후성 규칙을 만들어 내고 개별 마음은 그 규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조직한다. 뱀에 대한 공포와 범문화적인 뱀의 상징들, 그리고 색지각과 범문화적인 색 어휘의 상호작용은 후성 규칙에 의해 문화가 창조되는 사례들이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한다”고 했던가? 굴드와 르원틴의 혹독한 비판은 결과적으로 윌슨의 논리와 근거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었다. 다만 윌슨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윌슨=유전자 결정론자’ 혹은 ‘사회생물학=유전자 결정론’이라는 등식이 학계와 대중 시장에 유통되고 있다. 최근에 각광받고 있는 ‘진화심리학’ 분야의 학자들은 거의 전부 젊은 시절, 윌슨의 <사회생물학>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행동생태학에 입문한, 윌슨의 후예들이다. 하지만 유통되는 그 등식이 부담스러운지 몇몇 진화심리학자들은 윌슨과 자신들을 애써 구분지려 한다. 사실, 유전자 결정론자로 치면 디엔에이(디옥시리보핵산)의 구조를 발견했고 인간게놈프로젝트를 발진시켰던 왓슨만한 사람도 없는 데 말이다.

억울할 것이다. 하지만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과업 앞에 그런 비판에 신경쓸 여력이 없는지도 모른다. 최근 국내에도 번역출간된 <통섭: 지식의 대통합>(1998)은 진화 및 신경생물학을 디딤돌로 하여 자연과학, 인문학, 사회과학, 심지어 예술을 통섭(統攝·컨실리언스)하려는 시도로서 <사회생물학> 이후 23년 만에 나온 윌슨의 최대 역작이다. <통섭>에서 윌슨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좌절된 꿈을 되살리고 현대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21세기 르네상스인이다.

지구 생태보전 활동지원

하지만 다수의 과학철학자들은 윌슨의 시도에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의 통일성’ 문제는 지난 한 세기 동안 과학철학계의 핵심 쟁점이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가 윌슨 말처럼 그리 간단할 리 없다는 것. 예컨대 물리학과 생물학의 통합을 위한 교량 법칙이 있는지에 대해 많은 철학자들이 회의적이다. 반면 통합의 정신을 누구보다 숭상하는 윌슨의 입장에서는 ‘통일’, ‘환원’ 등과 같은 용어의 개념분석에만 백년을 보낸 철학자들이 더 한심해 보일 것이다. 윌슨은 그들의 온갖 잔소리와 우려를 한 귀로 흘려보내고 묵묵히 자신의 신념을 좇아 결국 하나의 근사한 경험의 성을 건축했다. 그리고 이제 그 성문 앞에 서서 당당하게 “지식의 통일성이라는 개념은 근거 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런 개념은 실험과 논리의 혹독한 시험을 잘 견뎌 여러 차례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아직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적은 없다”고 말한다.

장대익/ 한국과학기술원 강사 daeik@chollian.net
윌슨의 통섭적 태도는 생태학 및 환경정책 분야에서 독특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는 <생명의 다양성>(1992), <바이오필리아 가설>(1993), <생명의 미래>(2002) 등 일련의 생태·환경학 저서들을 통해 환경 위기를 경고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왔다. 그것은 인문, 사회, 자연과학을 통섭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로서 경제 논리나 뉴에이지식 해법과는 격이 다르다. 예컨대 환경과의 선천적 유대감을 뜻하는 ‘바이오필리아’ 개념은 진화론적 관점이 녹아들어간 생태학 및 환경정책적 신개념이다. 그는 현재 제인 구달 박사처럼 지구의 생태 보전을 위한 여러 운동들을 지원하고 있다. 개미 전문가에서 사회생물학자로, 그리고 이제는 통섭의 전도사로 자신의 정체성을 진화시켜가면서도, 산과 바다를 돌며 온갖 동물들과의 연대감을 만끽했던 초심은 여전히 팔딱거리며 생명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통섭의 달인이 평생을 통해 보여준 최고 수준의 넘나들기는 세력권 방어와 속성 짜깁기에만 급급한 다수의 지식인들에게 큰 도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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