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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흘간의 불꽃튀는 막전막후 외교경연 끝에 잠시 막간 휴지기에 들어간 제4차 북핵 6자회담의 주역들. 왼쪽부터 ‘개성파’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 ‘성실파’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뚝심파’ 송민순 외교부 차관보.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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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빴던 6자회담 막전막후 접촉 갑작스런 북-미접촉 요구 수용한 ‘개성파’ 힐 ‘감독’과 하나돼 차분한 논리 편 ‘성실파’ 김계관 고비마다 중재로 협상 이어나간 ‘뚝심파’ 송민순 도박사로, 인파이터로, 형사로 변신 거듭하며 주인공 3인의 ‘협상 드라마’는
현장 속 현장 13개월 만에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6자회담이 13일 만에 일단 휴회로 막을 내렸다. 이번 회담에선 그간 세 차례 열린 6자회담에서 볼 수 없었던 ‘협상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회담 기간 내내 이견이 충돌했고, 이를 풀려는 중재가 막판까지 시도됐다. 회담장인 조어대에선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외교 경연이 연일 불을 뿜었다. 회담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해도 미국과 북한, 그리고 한국이었다.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송민순 외교부 차관보는 각기 다른 성격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때론 거액의 판돈을 노리는 도박사로, 때론 사각의 링에 오른 권투선수로, 때론 사건의 배후를 캐는 형사로 변신을 거듭하며 회담을 이끌었다. 핵 문제 ‘앙숙’ 함께 냉면 먹다? 이들의 열연은 조어대 안에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무대는 회담장 밖에도 있었다. 이들의 숙소인 국제구락부와 북한대사관, 중국대반점 앞에선 아침 저녁으로 간이무대가 펼쳐졌다. 회담의 진척 상황을 암시하는 현란한 수사와 상대의 기를 꺾으려는 교묘한 언사가 이곳에서 쏟아졌다. 그리고 아직까지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그들만의 비밀스런 회합도 있었다.7월30일 저녁 베이징 시내 북한 음식점 ‘해당화’에 일단의 무리들이 모여들었다. 힐 차관보와 김 부상을 필두로 한 미국과 북한의 6자회담 대표들이었다. 미국 쪽에선 빅터 차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선임보좌관과 리처드 롤리스 국방부 부차관보가, 북한 쪽에선 리근 외무성 미국국장과 한성렬 유엔대표부 차석대사의 얼굴이 보였다. 핵 문제에 관한 한 ‘앙숙’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나라의 핵심 당국자들이 북한 음식점에서 미팅을 하는 전례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회동은 당시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틀 뒤 일본 언론에 “북-미 대표단이 베이징 시내 한 음식점에서 만찬을 함께 했다”는 짤막한 기사가 실렸을 뿐이다. 그 음식점이 해당화이고, 거기에 힐 차관보와 김 부상이 참석했다는 얘기도 없었다. 뒤늦게 한국 언론의 확인 요청을 받은 송 차관보도 “다른 나라 대표단의 움직임을 확인할 위치에 있지 않다”며 입을 닫았다. 훗날 여기저기서 새어나온 얘기들을 종합하면, 이날 만찬은 김 부상이 힐 차관보에게 시쳇말로 한턱을 낸 것이었다. 7월9일 베이징 시내 한 호텔에서 두 사람이 은밀히 만나 6자회담 재개에 합의했을 때, 힐 차관보가 밥값을 낸 데 대한 김 부상의 대접이었다는 것이다. 힐 차관보는 김 부상의 초대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조만간 답례할 날을 잡겠다고 화답했다. 6자회담 재개를 이끌어낸 두 주역이 의기투합한 것이다. 해당화는 북한이 직접 운영하는 음식점으로, 특히 김치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이곳의 김치는 ‘평양 통배추김치’인데, 속을 거의 넣지 않아 깔끔하고 시원한 맛을 낸다. 이 김치를 소개한 책자를 보면 “조상대대로 전해오는 조선 민족의 요리법에 철저히 의거했다”며 “너무 익더라도 절대 버리지 말고 삼겹살이나 돼지고기와 함께 볶으면 별맛”이라고 권하고 있다. 이곳의 냉면 맛도 일품인데, 조훈현 국수가 베이징에서 바둑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꼭 들러 먹고 간다고 한다. 힐 차관보를 비롯한 미국 대표들에게도 이 김치와 냉면이 나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힐 차관보와 김 부상의 해당화 만찬은 6월30~7월1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학술세미나에서 이뤄진 북-미 간의 ‘데이트 약속’에서 비롯했다. 뉴욕 세미나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6월14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면담한 자리에서 “7월 중에라도 6자회담에 나갈 수 있다”고 밝힌 이후 열린 북-미 접촉이어서 회담 재개 일정을 잡는 최후의 고비가 될 것으로 예상됐던 자리였다. 이 세미나에서 리근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은 조지프 디트라니 미국 국무부 대북협상 대사에게 은밀히 힐 차관보와 김계관 부상의 베이징 회동을 제안한다. 7월9일 베이징에서 중국을 사이에 두고 한번 보자는 거였다. 두 사람의 밀담은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도 곧바로 알리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보안에 붙여졌다. 미국 정부는 치밀한 내부 검토를 거쳐 얼마 뒤 북한의 제안을 수락한다. 6자회담 재개가 확정되지도 상태에서 북한과 만난다는 데 대한 거부감이 적지 않았지만, 중국이 낀다면 굳이 피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는 힐 차관보의 설득이 주효했다고 한다. 남-북 입장 탐색 위한 점심 회담 그러나 만남을 약속한 7월9일이 다가오자 북한의 태도가 돌변했다. 힐 차관보가 당시 중국 방문을 계획 중이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에 하루 앞서 베이징에 들어가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북한이 갑자기 중국에 나서지 말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북한은 중국이 끼면 미국도 만나지 않겠다며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북-중-미 회동을 북-미 양자접촉으로 몰아가려는 의도였다. 힐 차관보는 뒤늦게 중국에게서 이런 내용을 전해 들었지만 개의치않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중국은 힐 차관보와 김 부상이 마주 앉자 곧바로 자리를 비켜줬다. 중재자의 체면을 지키면서 북한의 요구도 반영한 것이다. 김 부상의 해당화 만찬은 이런 ‘약속위반’에 대한 사과의 뜻도 담은 것으로 보인다. 김 부상은 송 차관보와도 회담장 밖에서 일합을 겨뤘다. 7월24일 송 차관보가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베이징에 도착한 직후였다. 두 사람은 천안문을 동서로 잇는 장안대로에 있는 ‘장안구락부’에서 점심 무렵 만나 이번 회담에 임하는 서로의 입장을 탐색했다. 이날 회동에는 두 사람 외에 조태용 북핵외교기획단장과 리근 미국국장 등 차석대표들도 모두 참석했다. 절정은 ‘남-북-미 3자협의’ 성사 이날 두 사람의 탐색전이 벌어진 장안구락부는 베이징의 실력자들이 모이는 고급 사교장이다. 2002년 <포브스>가 발표한 중국의 100대 부호 가운데 5위를 차지한 홍콩 부화그룹 진려화 회장이 세운 곳으로, 베이징에선 권력과 재력의 상징으로 통한다. 한국인 가운데는 김하중 주중대사 등 몇 안 되는 이들만이 이곳의 회원권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특히 남북관계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을 열기로 남북 당국자들이 합의서에 서명하고 축배를 든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밀사 구실을 했던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23일 동안 베이징과 상하이에 머물며 이곳을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결국 여섯 차례의 비밀접촉 끝에 4월8일 박 전 장관은 송호경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서에 서명했다. 두 사람은 서명을 마친 뒤 이곳에서 폭탄주를 돌리며 성사를 자축했다. 박 전 장관은 훗날 “송 부위원장이 술을 참 잘 마시더라”며 “한민족은 폭탄주 체질인 것 같다”고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뉴욕 세미나 때 구상한 북-미 해당화 만찬과 남북의 장안구락부 회동은 이번 회담에서 드러난 힐 차관보와 김 부상, 송 차관보의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힐 차관보는 감독의 지시에 따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나름대로 소화해 자신의 연기에 담아내는 개성파였다. 북한의 갑작스런 북-미 접촉 요구를 대범하게 수용하고, 해당화 만찬에도 기꺼이 응한 데서 그런 성격을 읽을 수 있다. 그의 행보는 절도가 있으면서도 유연했다. 그는 기조연설에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체어맨 김정일’이라고 부르는 파격을 선보이기도 했다. 김 부상은 감독의 생각과 혼연일체가 되어 어떤 상황에서도 방심하지 않는 ‘성실파’였다. 그의 연기는 상대는 물론, 관객의 심리까지 계산할 정도로 치밀하고 노련했다. 해당화 만찬은 힐 차관보에게 진 빚을 갚으면서 회담장에서 허를 찾으려는 계산된 승부수였다. 그는 회담 기간 내내 일체 목소리를 높이는 법 없이 시종일관 차분하게 논리를 폈다. 송 차관보는 은근과 끈기로 무장한 ‘뚝심파’였다. 그는 남북 정상회담 성사의 역사가 깃든 장안구락부에서 김 부상을 만나 협상을 통해 얻을 것을 얻으라고 권유했다. 회담장에서도 고비마다 집요한 중재와 과감한 추진력으로 협상의 끈을 이었다. 그의 뚝심은 북-미가 평화적 핵 이용 권리를 놓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던 8월4일 남-북-미 3자 협의를 성사시키며 절정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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