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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18 16:59 수정 : 2005.08.19 14:26

김찬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강의교수

최대한 빨리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속도 숭배 문화 속에서 승객은 수화물로 전락한다 반세기도 넘도록 바뀌지 않은 이런 풍경 속에서 마음의 힘으로 운전하는 친절한 버스를 타게 되면 자신의 존귀함을 새삼 체감하게 된다

생활속의 문화사회학

 “전차를 타고 가면서 보면 정류장마다 서 있던 군중들이 서로 먼저 타려고 애쓰는 양이 잘 보인다. …이번 차에 꼭 타지 않으면 무슨 큰 낭패라도 있을 듯한, 모두 그러한 표정들이다. …그 표정들이 너무 심각하여 거의 필사적이라고 해야 할 지경이다. …사소한 일에 심각한 표정을 갖는 민족은 지극히 불행한 환경 속에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고…”

이것은 역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역사 앞에서>에 나오는 1948년 어느 날의 일기다. 해방 이후 극심한 혼란이 일상 곳곳에 투영되어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황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별 다름이 없는 듯하다. 버스정류장의 풍경을 보자. 승객들은 멀리서 들어오는 버스가 어디쯤 멈춰 문을 열 것인지를 가늠하느라 머리를 굴린다. 뛰어가서 탈까 아니면 기다리고 있을까 계산해야 하는 것이다. 기껏 뛰어 갔는데 버스가 전진하는 바람에 다시 뛰어 와야 하는 경우도 흔하다. 종잡을 수 없는 정차 지점을 둘러싸고 승객들은 우왕좌왕한다. 버스 체제가 획기적으로 바뀐 서울에서도 이런 모습은 여전하다.

승차 후에도 안심할 수 없다. 사람들이 모두 올라서면 곧바로 문을 닫고 출발하기 때문이다. 승객들은 신속하게 교통카드를 찍고 나서 손잡이를 번갈아 잡아가며 자리까지 도달해야 한다. 고도의 순발력과 평형감각이 요구되고 노약자들은 위험하다. 내릴 때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잠깐 방심하면 하차 정류장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벨을 누르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미리 문 앞에 나와 서 있어야 한다. 정차 후에 일어서서 나온다면? 운전사의 싸늘한 눈초리에 승객들도 가세할 것이다. 민첩하게 움직이지 않는 승객들에게 어떤 운전사는 무언의 꾸지람을 한다. 군대의 훈련소에서 자주 듣던 말이 불현듯 들려오는 듯하다. “동작 봐라, 동작 봐!”

조급증은 교통사고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우리는 왜 이렇게 서두르고 쫓기는가? 목적지에 최대한 빨리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이다. 운전자만이 아니라 승객도 그 관성에 함께 젖어든다. 그래서 보행자의 입장에서는 신호와 차선을 무시하고 난폭 운전하는 버스를 보면 화를 내면서도, 자기가 탄 버스가 그렇게 달려가면 기특해 하고 고마워한다. 이렇듯 속도 중독은 우리의 일상 의식과 사회 시스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맹목적으로 서두는 습관, 일단 빨리 가고 보자는 시간 감각 등이 거기에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스피드 숭배 속에서 사람은 수하물로 전락해버린다. 짐짝처럼 취급받는다고 느끼는 승객들은 자가용의 온화한 승차감을 그리워한다.

버스는 전적으로 운전사가 책임지는 이동공간이다. 그래서 그런지 시내버스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은 운전사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다. 그의 기분이 내키면 정류장이 아니라도 승하차가 가능하고, 내릴 승객이 없으면 정류장을 그냥 통과해 버릴 때도 있다. 전자는 아량이고 후자는 횡포다. 차 안에서 운전사는 냉난방 온도와 라디오 채널을 조절한다. 또한 차를 세워 놓고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하고 심지어 핸드폰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어쩌다가 다른 버스 기사와 안면이 있는 사이일 때 차를 멈춰 창문을 열고 큰 소리로 잡담을 나눈다. 그러면서 정작 행선지를 묻는 승객에게는 짜증스러운 낯빛으로 마지못해 대답할 때가 많다. 쌀쌀맞은 말투에 승객은 자기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듯 겸연쩍어 하기도 한다.

승객들은 운전자들의 이런 행위나 태도를 웬만해서 문제삼지 않는다. 그러나 시골의 읍내를 돌아다니는 버스라면 몰라도 대도시의 공공 서비스라고 하기에는 위화감이 있다. 수백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살아가는 공간에서 대중교통은 예측 가능해야 한다. 운전자의 업무는 표준화되어야 마땅하다. 그가 상대하는 손님들이 불특정 다수이기 때문이다. 운전자로서는 너무나 빤한 질문을 하루에도 몇 십번 받으니 짜증이 나겠지만, 그 버스를 처음 타는 승객들에게는 정확한 정보가 긴요하다. 그들의 아쉬운 입장을 헤아려 자상하게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운전자에게 있다. 표준화가 기계화된 노동으로의 소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운전자들은 그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프로’의 면모를 구현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느긋함과 최선을 어렵게 하는 구조적 요인들은 개선되어야 한다. 또한 부득이하게 배차 간격이 벌어졌는데도 다짜고짜 운전자를 윽박지르는 승객들도 자제해야 한다. 우리에게 아쉬운 것은 ‘이동의 문화’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옮겨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여유다. 시간의 속박에서 풀려나 주행의 품위를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에는 승객들을 깍듯하게 대하는 운전자들이 부쩍 늘어났다. 당국과 회사의 지침이나 감시 카메라의 작동 또는 소비자의 의식 향상 등의 작용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운전자들이 그러한 외적 조건에 의해 조종되기만 하는 꼭두각시는 아니다. 그런 운전자들의 얼굴을 보면 억지로 부드럽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친절을 베풀면서 일하는 보람을 느끼는 표정이 역력하다. 생각해보면 버스 기사는 하루에 몇 백 명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넬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승객들의 안락한 이동이 자기의 손에 달려 있음에 뿌듯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으리라. 친절이라는 것도 바로 그러한 자기완성의 미학이 아닐까. 노인이나 장애인의 느린 동작을 기꺼이 기다려주고, 아주머니에게 행선지를 정성스레 설명해주는 버스 운전자들을 만나면 하루 종일 흐뭇하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노동의 신성함에 대하여 명상하게 된다. 자기의 직업을 사랑하기 어려운 시대에 스스로 멋을 창출하는 지혜 한 수를 배운다. 마음의 동력으로 운전하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승객들은 자신의 존귀함을 새삼 체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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