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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코리안 차별은 민족문제 아닌 인권문제” 신숙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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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성공한 사업가 · 인기 강사지만 먹고 살기 위해 호스티스 빼곤 다 해봤다 극우 이사하라 도쿄도 지사 퇴진 앞장서며 영주권자로 강하고 즐겁게 생활한다 “한국 안 온갖 차별 · 억압에 눈 감는다면 우리가 일본 우익을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이재현의 인물로 세상읽기/ 재일동포 3세 인권운동가 신숙옥씨 신숙옥씨는 재일 코리안 3세 여성 인권운동가인데, 경영 컨설팅 업체를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이기도 하다. 매스컴과 각종 기업체 등의 인기 강사인 그는 일본 헌법 개정을 반대하는 집회에서 자신의 체험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최근 언론 여기저기에서 차별에 대해 말 하면, ‘나가’라든가 ‘돌아가’라는 말이 튀어나옵니다. 그러면, ‘하이, 알았습니다. 조선인은 모두 돌아갑니다. 천황을 따라서 함께 돌아갑니다’라고 말해줍니다.” 아키히토 천황이 2001년에 간무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는 기록을 거론하면서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고 말했던 것을 풍자하면서 집회 참가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다. 그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등교 거부, 전학, 자퇴, 가출 등을 되풀이하면서 나름대로 살아남는 법을 익혔다. 새로 전학 가서 교실이 배정되면 우선 제일 강해 보이는 듯한 사내아이를 가방으로 때리며 ‘아무쪼록’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유연하게 착석했다고 한다. 그러면, ‘이지메’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급식 당번 때는, 천적인 아이에게 “일본 남자는 소식하는 거 알지?”라고 말하면서 수프를 몇 방울만 늘어 떨어뜨리며 노려보았다고 한다. 신숙옥씨는 상업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뒤에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신문·야쿠르트 배달, 건물 청소원, 접시닦이, 쓰레기 수거, 웨이트리스, 심야다방 디제이(DJ) 등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다만 호스테스만 빼고 말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도쿄 시부야에서 태어나고 도쿄에서 자란, 삼대째 ‘에도’ 토박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내 소수민족 출신으로서 국적은 한국이고 일본 영주자격을 갖고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재일 코리안이다. 그는 재일 코리안의 문제를 민족문제가 아닌 인권문제로 본다. “1965년 한일협약을 다시 바라봐야 한다. 한국 정부는 일본 군대 위안부 여성들, 재일 코리안들, 한국 바깥의 코리안들을 희생시켜가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돈을 받아냈다. 한국정부는 다시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가해자를 분명히 규탄하고 피해자를 구제해야 한다. 이제라도 한국 정부는 정권 유지를 위해 재일 코리안을 이용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고 이들의 인권 상황을 해결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묘하게도 나는 신숙옥씨에 대한 이러한 정보의 상당 부분을 어떤 일본 우익의 개인 홈페이지에서 얻었다. 신숙옥씨는 일본 우익의 대표적 정치가인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의 퇴진 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는데, 강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신숙옥씨를 일본의 우익은 매우 싫어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는 중학교 여학생이 “우익과 좌익은 어떻게 다른가”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우익은 바보라도 아무나 될 수 있지만, 좌익은 공부하지 않으면 될 수 없단다.” 이시하라는 얼마 전에 도쿄의 프랑스어학교 교장을 비롯한 프랑스어 연구자들에 의해 명예훼손과 영업방해 혐의로 제소되었다. 과거에도 인종 차별이나 여성 비하 발언을 수시로 감행한 적이 있는 이시하라가 작년 10월에 “프랑스어는 수를 계산할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에 국제어로는 실격”이라는 무지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에서다.수를 세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손가락 수에 상응하는 10진법 말고도 60이나 20 혹은 12라는 단위로도 수를 셀 수 있다. 이시하라 논법대로라면 60분 단위의 시계나 일주일과 12달 단위의 달력도 문제이고, 계산 처리의 편리함 때문에 16진법이나 2진법 체계를 사용하는 컴퓨터도 ‘국제적으로’ 써서는 안된다. 여기서 내가 이시하라를 무지하다고 말할 때 책가방 끈이 짧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이시하라는 대학 재학 시절인 1956년에 소설 <태양의 계절>을 발표해서 일약 인기작가가 되었다. 그는 아쿠타카와상을 타기도 했고 그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영화에 출연한 그의 동생이 인기 배우가 되기도 했다. 이시하라는 당시 일본의 신세대 감수성을 문학적으로 대변하고 있었는데, 일본 현대문학사의 서술에 의하면 그 소설의 주인공은 ‘무사상, 무윤리, 무감각’의 상태에서 ‘성과 폭력을 쾌락주의적으로 추구’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태양족’이라는 말이 생겨서 유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이시하라는 미시마 유키오와 같은 작가 계보에 속하는 것이다. 그 반대편에 오에 겐자부로와 같은 양심적이고 비판적인 작가가 있다. 이시하라는 1999년에 “도쿄로부터 일본을 변화시키자”란 슬로건으로 도쿄도 지사에 당선되었다. 그는 이미 1968년에 정계로 진출해서 참의원, 중의원을 거쳐서 방위청장관과 운수상을 역임했는데, 그의 다른 책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은 한참 동안 베스트셀러였다. 이시라하는 1932년생이지만 일본 근현대사 전체를 통틀어서 말한다면 신세대 우익인 셈이다. 무지하기 때문에 우익이 된 것이기도 하고, 또 동시에 우익이 되면서 더 무지해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시하라보다 더 젊은 신세대 우익 정치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중의원을 해산했다는 뉴스를 들은 날부터 나는 공교롭게도 며칠 간 계속해서 여름 설사로 고생을 했다. 습관적으로 약과 병원을 멀리 하는 나는 밥을 거의 안먹고 견디다가 마침내 도저히 참지 못하고는 ‘정로환’을 찾게 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로환은 러-일전쟁 때 일본에서 개발한 약이다. 한국에서는 바를 정(正)자를 쓰지만 본래 일본에서는 칠 정(征)자를 쓴다. 그러니까 정로환은 러시아를 정벌하는 환약이란 뜻이다. 정로환은 작년에 도쿄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 자리한 일종의 전쟁기념관인 ‘유수칸(遊就館)’에서 개최된 <일-로전쟁 백년전>이라는 특별전시회에서도 전시되었다. 일본 약 상자에 그려져 있는 인물은 일본의 초대 육군 군의감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들 일제 36년이라고 말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일본이 ‘일-로전쟁’에서 승리한 1905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우리가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것은 1945년이지만 여기에는 남북 분단에 의한 냉전체제의 유지라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므로 아직 한반도에서 냉전체제가 해체되지 않는 이상에는 온전한 의미에서 식민지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백년 전에 개발된 약을 먹으면서 사소한 설사의 치유에도 이렇듯 동아시아 현대사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매우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소위 민족감정이나 좌우 이념의 정치적 판단을 떠나서 말한다고 하더라도, 이시하라는 여전히 무지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무지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무지다. 9·11테러 사태가 벌어지자 만에 하나 그것이 북한의 소행으로 밝혀진다면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바깥에 나가지도 못했다고 신숙옥씨는 자신의 체험을 절절하게 밝히고 있는데, 재일 코리안의 차별은 민족문제가 아니며 한국도 가해자라고 말하는 신숙옥씨의 발언을 우리는 더 섬세하고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가 정로환에 의지하게 된 것은 대낮에 열 번 가까이 화장실을 드나들면서 급기야 휴지에 묻어있는 피를 보고 난 다음이었다. 피를 보니 겁이 덜컥 났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중의원 해산 소식을 알리는 신문의 다른 면에 실린 두산 그룹 ‘형제의 난’ 후속 보도라든가 60억대 자산을 가진 할머니가 자녀들과의 불화 때문에 한강에 투신했다는 뉴스를 곰곰이 새겨보면 그런 식으로 ‘피’에 얽매여 즉자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결국에는 큰 잘못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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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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