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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는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는다. 이 작은 어머니는 맹수의 발톱을 가지고 있다.” 19살의 카프카는 이렇게 말했다. 카프카는 프라하를 벗어나고 싶어했지만 몇 차례의 여행과 말년의 요양 기간을 빼면 프라하를 떠나지 못했다. 사진은 프라하를 상징하는 카렐교. 오른쪽 멀리 프라하 성이 보인다. <카프카, 프라하의 이방인>(클라우스 바겐바흐 지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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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공간이 이어지는 그의 소설에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삶의 고통을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달리 해석하면 삶은 종말 없는 과정이며 따라서 출구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에 있음을 의미하는 열린 삶의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볼 수
고전 다시읽기/ 카프카 ‘성’ 카프카는 ‘끝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것은 소설을 미완성인 채 두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완결되지 않은, 그러나 충분히 완성된 그런 소설이어야 했다.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왜냐하면 소설의 끝이란 여백을 마주하고 있는 글자들의 경계선이 아니라, 소설의 모든 이야기가 결국은 그리로 귀착되는 귀결점이고, 따라서 이야기가 시작하자마자 항상-이미 존재하면서 이야기를 방향짓는 목적지기 때문이다. 이게 없다면 이야기는 횡설수설 종잡을 수 없는 잡담이 되고 말지 않을까? 카프카는 <성>을 비롯해 세 편의 장편소설을 모두 끝없는 소설로 썼다. <성>의 경우, 건축기사 케이(K)는 성의 요청으로 방문하지만 요청한 사람을 찾지 못해 성 아래 마을에 머물며 성 안에 들어갈 길을 찾는다. 그는 결국 성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 와중에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다양한 양상의 욕망과 삶을 만나며 ‘여행’한다. <성>은 이 끝없는 여행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완결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완성된 소설이다. <소송>은 친구 브로트의 신학적 편집으로 인해 케이의 죽음으로 끝나지만(제목도 ‘과정’을 뜻하는 소송이 종말을 뜻하는 ‘심판’으로 오역되었다), 사실 거기서 그가 하려는 것은 최종심판의 ‘무한한 연기’를 통해 삶을 끝없는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 그는 또 아주 다른 시점들이, 혹은 아주 다른 공간들이 만나고 공존하는 새로운 공간을 소설에 담고자 했다. 가령 <소송>에서 케이는 티토렐리 집에 가려고 재판소와 반대 방향으로 갔지만, 그가 그 집 침대 뒤쪽 문을 열자 재판소가 나타난다. 혹은 일하던 은행의 복도 문을 열자 자기 집에 왔던 재판소 관리들이 형리들에게 매를 맞고 있는 공간이 나타난다. 등 위에 앞 얼굴이 달린, 혹은 앞 얼굴과 옆 얼굴이 한꺼번에 그려진 피카소의 그림처럼. <성>에서는 케이와 만나는 많은 화자들의 관점이 병존되어 있는데, 케이는 그 상이한 관점, 상이한 욕망들을 하나의 척도로 위계화하지 않고 그들 사이를 옮겨다닌다. 만나는 곳마다 다른 케이로 달라지면서. 그리고 그 달라지는 케이를 따라 전혀 다른 욕망이, 때론 정반대의 관점이 우리의 눈과 포개진다. 큐비즘적 소설을 쓰려는 것일까? 물론 어디를 가도 맴돌 듯 이어지는 뜻밖의 공간이 등장하는 그의 소설에서 막다른 골목 같은 삶의 고통을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분명한 건, 삶의 고통을 주시하는 사람은 대부분 그것의 해결책을 찾고 있다는 것이고, 삶의 절망을 보는 사람은 대부분 삶의 희망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갇힌 동물이 되어 말한다. “저는 자유를 원했던 게 아닙니다. 다만 하나의 출구를 원했습니다.”(‘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욕망과 권력의 관계 천착그 경우 삶이 종말 없는 과정 그 자체라는 말은, 출구란 에워싼 벽들 어딘가에 숨어 있는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에 있는 것임을, 거기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 경우 이리저리 엉뚱하게 이어지는 방들은 뜻밖의 방향으로, ‘운명’밖의 방향으로 열린 삶의 가능성들을 의미한다. 그 문들을 기꺼이 열려는 사람에게 삶이란 다양한 방향으로 열리는 희망의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카프카의 유명한 우화에서처럼, 자신을 위해 나 있는 문조차 들어가지 못한 채 멈추어선 그 지점에서 죽게 되는 절망의 세계일 것이다. 이렇게 씌어진 카프카의 소설들은 엄격한 시·공간적 통일성, 엄격한 시점의 일관성을 축으로 이야기를 짜나가는 근대적 소설의 형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디테일의 강력한 ‘리얼리즘’에도 불구하고 루카치 같은 근대주의자들이 카프카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20세기 현대문학이 카프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식의 과장 섞인 평가 역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카프카의 ‘모더니즘’은 문학형식 상의 근대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이런 식으로 카프카는 ‘모더니즘’이란 말조차 그 반대의 의미를 갖는 역설적인 것이 되게 만든다. 그러나 그렇다고 카프카의 작품이 세계와 대립된 고립된 개인의 욕망을, 결국은 혼자일 수밖에 없는 실존적 고통을, 근본적으로 비정치적인, 혹은 반정치적인 삶을 그리려고 했다고 말해선 안된다. 그와 반대로 그는 삶 자체가 정치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삶을 가르는 권력의 선분들을 카프카는 유심히 주시한다. 가령 <소송>에서 재판소 사무국의 공기는 거기에 드나드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설 수 없게 만든다. 물론 거기에 익숙해진 사람은 이제 바깥의 시원한 공기에 견디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능력과 권리를 변호사에게 맡겼던 상인 블로크는 그의 말에 복종하는 ‘변호사의 개’가 된다. 자신의 권리를 자신의 대표에게 위임하는 것으로 끝나는 근대인의 운명이 슬며시 포개진다. <성>에서는 욕망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천착이 더욱 강력하다. 올가의 동생 아말리아는 성의 관리 소르티니의 ‘수청’을 거절한다. 이 사실은 프리다를 통해 마을 사람들에게 금세 알려진다. 그러자 그렇게 잘 지내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찾아와 아말리아의 아버지에게 맡겼던 일감을 찾아가고, 그를 마을의 소방대장 자리에서 쫓아낸다. 그의 가족은 졸지에 ‘왕따’가 되고, 가족의 삶은 급속히 파괴된다. 아버지는 성의 관리를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하지만, 용서는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그들도, 성의 관리도 그들이 지은 죄가 무언지 모르기 때문에 용서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성이나 관리 소르티니는 아무런 처벌이나 제제를 가한 적이 없다. 하지만 아말리의 가족은 더할 수 없는 형벌을 받았다. 그것은 ‘위’에서 통치하는 성의 관리가 아니라 바로 ‘옆’의 이웃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아말리아가 소르티니를 거절했으니 성의 미움이나 처벌이 가해질 것이라는 예상 속에서 그 가족과 멀리하고자 했고, 그런 태도가 그들을 극단의 형벌로 밀고간 것이다. 아마도 이에 대해 푸코라면 이렇게 말했을 게 틀림없다: “권력은 밑으로부터 행사된다.” 일상적 삶에 정치 끌어들여 카프카는 이웃사람들이 행사하는 이런 권력, ‘밑으로부터의 권력’이 어디서 연원하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성의 명령이나 성의 규칙에 따르는 그들의 복종에서 나온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가령 프리다의 양모를 자처하는 여인숙 안주인은 프리다처럼 한때 관리 클람의 정부였던 사람이다. 그는 그 이후에도 클람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갖고 산다. 클람이 준 사진, 숄, 나이트 캡은 그 여자가 평생 간직하고 있는 기념물이다. 그 “세 물건이 없었다면 이곳 생활을 이처럼 오래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그 물건들은 그 여자로 하여금 억척스레 일하고 장사를 번창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삶을 살게 한 추동력이었고 동시에 그 여자의 심장에 자리잡고 그것을 잠식하는 병이었다.”(<성>) 클람의 편지를 꿈을 꾸는 듯한 모습으로 만지작거리는 면장의 부인 역시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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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서울산업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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