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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소설집 <그 여자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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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 닫혔던 후일담 금기의 시간서 풀려나 “지나갔다고 믿엇던 것이 쓰디쓴 알약이 되어 목젖에 걸렸다” 상실과 환멸의 시간 기술
상실과 환멸의 서사는 소설의 핵심적 구성 원리를 이룬다. 성취와 보람의 해피엔딩은 어쩐지 소설에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성취와 보람이 혹 소설에 등장하더라도 그것은 더 큰 상실과 환멸을 위한 보조적 구실로서나 소용될 따름이다. 이른바 ‘후일담’ 계열의 소설은 전형적인 상실과 환멸의 서사라 할 수 있다. 빛나는 청춘의 한때를 고귀한 대의에 아낌 없이 바쳤으나 시간의 경과와 함께 청춘은 스러지고 대의는 빛이 바래 버렸다는 이야기. 그럼에도, 겉보기엔 상실과 환멸이라지만, 역사의 긴 흐름으로 보아서는 역시 성취와 보람이 함께하는, 결국 잃은 것 못지않게 얻은 것 또한 쟁쟁한 세대. 그들의 모색과 좌절, 쟁투와 패배와 부활만큼 ‘소설적’인 글감도 많지 않을 것이다. 90년대 이후 후일담 소설들이 양산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당대 문단에서 ‘후일담’이라는 말은 어느새 금기어가 되다시피 했다. 충분한 만큼의 후일담 문학이 생산되지도 않았는데 후일담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마녀사냥’이 행해진 탓이다. 아직 할 얘기의 반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돌연 말허리를 꺾인 형국이다. 겁에 질린 작가들은 입 안에 남은 말을 웅얼거리는 식으로 얼버무리고는 다른 글감을 찾아 나서야 했다. 후일담계 소설들이 상투성과 감상성을 벗어나지 못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활로는 상투성과 감상성을 걷어낸, 제대로 된 후일담을 추구하는 것이지 아예 후일담 자체를 폐기처분하는 쪽은 아닐 터이다. 이제라도 다양한 미학적·형식적 장치를 갖춘 완성도 높은 후일담 소설을 ‘다시’ 쓸 때이다. 김인숙(42)씨의 네 번째 소설집 <그 여자의 자서전>(창비)을 넓은 의미의 후일담계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수록된 여덟 단편이 하나같이 후일담이라는 뜻은 아니다. ‘후일담’의 뜻을 넓혀서 상실과 환멸의 서사 일반을 가리키도록 할 때, <…자서전>은 갈 데 없는 후일담에 해당한다. <…자서전>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지나간 한때’의 광휘에 사로잡혀 있다. 광휘는 벌써 희미해졌고 남은 것은 그 그림자일 뿐이지만, 그들의 삶은 지난날의 광휘가 드리운 주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황홀한 상승과 절정의 기억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현재는 하강과 나락의 이미지로 덧칠된다. <숨은 샘>의 주인공 ‘이영호’는 전형적이다. 저 들끓었던 80년대의 대학시절을 오로지 도서관에서 책을 파는 것으로 시종했던 그는 뒤늦게 공기업 파업을 주도하다가 해고되고 지금은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보험외판원이 되어 있었다.”(56쪽) 친구들의 보이지 않는 눈총 속에 도서관을 사수하면서도 ‘나도 언젠가 한번은 내 전부를 걸고 힘차게 뛰어볼 거라’(59쪽)던 속다짐을 실천에 옮긴 결과였다. 결국 그는 ‘전부’를 잃은 셈이지만 그럼에도 후회는 없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어”(59쪽)라고 회고하는 그에게는 그래도 화려한 시절의 기억이 남았다. 대학 시절에 이미 치를 것을 다 치르고 이제는 각자 제 자리를 찾은 친구들에 비해 그는 오히려 늦되고 어리석은 축에 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된 그가 올된 ‘우리들’에게 주는 새삼스러운 각성의 효과는 있다. 그를 지켜보는 화자는 말한다. “우리들에게 지나갔던 것, 지나갔다고 믿었던 것이 갑자기 쓰디쓴 알약이 되어서 목젖에 걸렸다.”(4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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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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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났던 한때, 그러나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가 ‘버린’ 시절을 회한에 찬 어조로 회고하는 인물들은 다른 거의 모든 작품들에도 마찬가지로 등장한다. “우리들의 대학시절, 아직 청춘만이 전부일 수 있었을 때,(…) 밀실에서 중국혁명사를 공부했”(92쪽)던 <바다와 나비>의 주인공, 각자의 복잡한 사연을 뒤로한 채 중국에서 만난 여자를 두고 “그녀의 생은 어느 순간 어느 정점에서 위대했었을까”(123쪽) 궁금해하는 <감옥의 뜰>의 주인공,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내 인생의 절정기가 아니었나”(140쪽) 생각하는 <밤의 고속도로>의 주인공, 식물인간이 되다시피 한 남편과 결혼하던 날을 되새기며 “여보, 그래도 난 그날 얼마나 행복하던지”(209)라 말하는 <모텔 알프스>의 주인공, 성우로서 텔레비전 광고에 목소리로 출연했던 화려한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빨간 풍선>의 주인공 등…. 이들에게 과거의 영광은 훈장이라기보다는 상처로서 남아 있다. 왜 그러한가. 그럴 수밖에 없는가. 대학 시절의 ‘이영호’와 <바다와 나비>에서 ‘코리안 드림’을 좇아 한국으로 나가려는 스물다섯 살 조선족 처녀 ‘이채금’은 행복한 결말을 믿는다는 점에서 공통되다. “나는 해피엔딩을 믿어”(43쪽)라는 영호의 순진한 고백은 “난 잘살 거예요. 난 행복하게 잘살 거라구요!”(87쪽)라는 채금의 악에 받친 절규로 메아리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상실과 환멸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생각은 ‘죽음보다 더한 거’를 이야기하는 채금 아비의 말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건 말이지… 살아 있다는 거라구. 살아서 못 볼 것들을 모조리, 남김없이 다 봐야 한다는 거라구. 그것도 아주 천천히, 아주아주 오래… 가마솥의 개고기 뼈가 다 무르도록, 아주 오래오래… 흠씬 두들겨 맞아 나달나달해진 살 속에서 진국의 국물이 다 빠져나올 때까지 천천히 천천히… 아주, 아주 오래, 오래… 그렇게 보고, 또 보고 해야 한다는 걸 말이야.”(87~8쪽) 이런 도저한 절망과 허무는 <감옥의 뜰>의 주인공에 의해 비슷하게 되풀이된다. 못볼것 모조리 봐야 하는게 삶 “무언가를 잃어버리기에도 속절없어져버린 시간들… 노름으로 밤을 새우고,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여자를 붙여주고, 꽝꽝 얼어붙어 있는 도시의 한구석에서 새벽담배를 피우고… 그 시간들 속, 생에 대한 경멸조차도 속절없어져버린, 그렇게 비굴해져버린 나이를 너는 아니.”(129쪽) 엄살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과도해 보이는 감상과 자조는 두 소설이 모두 중국이라는 이역을 무대로 삼은 작품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집 전체를 놓고 보면 그 역시 상처와 좌절을 경험한 여주인공들이 자신들의 배우자를 안아주거나(102쪽, 214쪽),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겠노라 다짐(187쪽)함으로써 나름대로 균형을 잡아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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