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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18 19:47 수정 : 2005.08.19 14:22

최성각/ 소설가/ 풀꽃평화연구소장

칼 든 사내 둘이 튀어나왔다 내 지팡이 끝엔 칼이 있었다 내게도, 너희에게도 좋은 아침은 아닌 것 같다 서로 부드럽게 지나가자 내 표정은 간절했다

한때 비행기삯만 허락되면 나는 히말라야로 내빼곤 했다. 아무도 월급을 주지 않는 생활을 너무 오래 해왔기에 시간은 장마철 시냇물처럼 넉넉했고, 문제는 돈이었는데 비행기삯 외에 최소한의 돈만 마련되면 히말라야 산중으로 내빼는 게 되레 가계에 도움이 될 정도였다. 자주 다닐수록 더 적은 돈으로 더 오래 개길 수 있는 요령이 생겼는데, 그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수년 전 안나푸르나 사우스 지역으로 올라갔을 때였다. 히말라야 초입 너야풀을 거쳐 비레탄티라는 합수지점에 이른 뒤, 오른쪽으로 오르면 간드룽을 거치는 길이고, 왼쪽으로는 고라파니를 거쳐 푼힐에 이르는 길이다. 대단히 유명한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다. 알려져 있듯이 히말라야에 들어가면 누구나 예외없이 걸어야 한다. 카스트가 높은 ‘귀한 인간’도 걸어야 하고, 연금받는 백인 노부부들도 히말라야까지 차를 갖고 오를 수는 없다. 설산은 차고 냉정해서 누구나 무조건 걷게 만들고, 거기 오솔길은 짐을 실은 당나귀 정도밖에 허락하지 않는다. 간드룽 방향은 한국에 일하러 왔다가 정신병자로 간주되어 6년 4개월이나 강제치료를 받아야 했던 비운의 여인, ‘찬드라 구릉 사건’과 관련해 참회모금을 전달하는 일로 몇 차례 갔던 길이라 이번에는 고라파니 방향으로 올랐다.

너야풀을 떠난 지 사흘째, 푼힐의 지독한 안개와 고산증 초기증세로 결국 하산하게 되었다. 해발 3200m 가량의 푼힐에서 뒷골이 쑤시고 온몸에 열이 나면서 숨이 차면, 하산이 상책이었다. 어디로 하산할 것인가. 간드룽쪽으로 내려와 작은 내원(內圓)을 그리려 했으나, 그쪽은 며칠 전에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왔던 길을 택해 이른 아침 홀로 하산하는데 반탄티 지점부터는 하늘이 안 보일 정도의 밀림이었다. 앞 뒤 어디에도 인적이란 없었다. 그런데 20m쯤 앞 바위틈에서 사내 둘이 갑자기 용수철처럼 가볍게 튀어나왔다. 둘은 복면을 했고, 허리에는 꾸꾸리(네팔 전통칼)를 차고 있었다. 이럴 수가. 세상에, 말로만 듣던 히말라야 산적을 만난 것이었다.

본인들이 선택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다행히 아직 자기중심적이며 쾌락주의적이며 소비지향적인 산업사회에 오염되지 않은 사람들, 언제나 기분 좋게 잘 웃고, 타인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은 사람들, 달라이 라마의 말씀마따나 인간이 타인에게 할 수 있는 쉽고도 유일한 덕행이 친절이라는 것이 체화되어 있는 사람들, 산이 허락하는 자연자원에 만족하고 심지어 설산을 향해서 함부로 손가락질도 하지 않는 사람들, 각기 자기 단위의 시간관을 지니고 있으며, 죽음에 대해서도 상당히 의연한 사람들, 풀처럼 소박한 사람들, 달리 말한다면 그리스 문화나 헤브라이즘에 아무런 신세를 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눈에 핏발이 선 산업사회 사람들보다 행복지수가 높은 산사람들, 산 아래 힌두 카스트로부터도 자유로운 히말라야 사람들을 내가 얼마나 사랑했던가. 허락만 되면 히말라야를 자주 찾았던 까닭은 그들의 얼굴과 미소에서 서둘러 산업사회로 진입하기 전의 우리 얼굴을 다시 보기 위해서였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히말라야 산중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 맑고 넉넉한 얼굴이 바로 우리 이웃의 얼굴이었다. 일에서는 조급하고, 타인에게는 거칠고, 자연에 대해서는 무례하기 짝이 없으며, 개발과 고도성장에 환장해 있는 지금 우리 모습이 본래의 우리 모습인가, 우리도 한때 히말라야 몽골리안들처럼 살던 부모님과 이웃들 품에서 자라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 모습은 타고 난 것인가, 태어난 뒤에 휩쓸려 망가진 모습인가. 혹시 아직도 구원의 가능성은 있을까, 아무도 월급 주지 않는 한국사회보다 그런 꼴난 질문을 하기에 좋았던 곳이 바로 히말라야 산중이었고, 거기 설산보다 내 관심은 거기 사는 몽골리안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이른 아침 ‘히말라야 내 사랑’이 산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녀석들은 긴장감 속에서도 보무당당하게 나를 향해 다가왔다.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밀림지역이라 녀석들은 겁대가리 없이 거기 홀로 나타날 손님을 기다렸는데 바로 내가 걸렸던 것이다. 낡은 천으로 복면을 한 모습과 한 손으로 칼의 손잡이를 잡고 서툰 자객들처럼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다소 희극적이었으나 근래 네팔에서 자생한 ‘마오 반군’은 아니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반군이라면 칼 대신 총을 들고 있을 일이었다. 다행히 나는 전날 밤, 로지(여인숙)에서 근래 살인사건에다 산적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어쩜 일어날지도 모를 일을 대비해 산을 오를 때 짚던 나무지팡이에 등산용 대형 칼을 고무줄로 팽팽하게 감아 창을 만들어놓았던 터였다. 창 끝에는 투명한 팻트병을 잘라 씌워놓았는데, 칼집 대용이었다. 산적들이 가까이 다가와 일전을 벌여야 할 숙명적인 거리에 맞닥뜨리자 나는 페트병을 신속하게 벗겨냄으로써 내가 들고 있는 지팡이가 날카로운 칼이 부착된 ‘사제 창’이라는 것을 그들이 재빨리 알아채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무게중심을 뒷발에 싣는 후굴자세를 취했다. 내 창은 정확히 그들의 가슴께를 겨냥했다. ‘이 컴컴한 밀림에서 너희들 산적을 만난 것은 내 불행이기도 하지만, 창을 준비하고 하산하는 조선사람을 만난 것은 너희에게도 ‘좋은 아침’은 아닌 것 같다. 우리 모두 서로 부드럽게 스쳐지나 가는 게 서로를 위해 대단히 좋지 않겠는가‘, 황소의 목도 단칼에 벤다는 무시무시한 네팔 칼을 들고 내 주머니의 몇 푼 안 되는 달러와 등산화 따위를 털려는 두 놈의 히말라야 산적에게 내 간절하지만 준열한 표정은 아마도 매우 곤란한 심사를 자아냈던 모양이다.

하느님이 보호하사, 결국 내 소망대로 사태는 잘 마무리되었다. 산적들은 아마, 창을 상당히 잘 사용할 것 같은 재수없는 이방인을 털기에는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지도 모르겠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나 싶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히말라야에 산적을 출몰하게 만든 것은 무슨 이유로든 거기 자주 들락거리며 돈의 위력을 생생하게 보여준 우리 산업사회에 속한 ‘나같은 인간들’ 탓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참으로, 전적으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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