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25 15:35
수정 : 2005.08.25 15:37
역사로 보는 한주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는 양국간의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이에 양국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했으며…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또한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앞 조항에 명시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한 완전히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할 것을 승낙한다.”
95년 전인 1910년 8월29일, ‘경술 국치일’로 알려진 그날 공표되고 발효한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은 이렇게 시작해서 제8조까지 이어진다. 뒷 조항들은 한국 왕족과 충성하는 귀족 및 관리들 재산을 지켜주고 벼슬도 주는 등 예우하겠다는 얘기들로 대부분 채워져 있다. 이 ‘조약’이란 이름의 국권강탈 최종절차가 마무리된 것은 실은 1주일 전인 그달 22일이었고, 조인자는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은 이토 히로부미가 천거한 이완용 내각 총리대신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이었다.
경기도 광주 출신 이완용(1856-1926)은 과거에 합격한 뒤 1887년부터 3년간 미국에서 근무했다. 1895년 민비(명성황후) 시해사건 뒤 친러·친미파와 친일정권 타도를 모의했다가 실패하자 미국공관으로 피신했으며 1896년 아관파천 때도 반일친러파 중진으로 활동했다. 그런 그가 1904년 러일전쟁 뒤 일제가 대세를 잡자 그 주구가 됐다.
현재 일본에서는 당시 일본의 조선강점이 국제법상 합법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국제법학계의 통설이라는 주장이 여전하며 2001년 미국에서 열린 ‘한국병합재검토 국제회의’라는 데서 다수의 외국연구자들이 그런 입장이었다는 사례도 든다. 미국 영국이 애초 일본의 조선병탄의 공모자였거니와, 거기에 모여 국제법을 운위할 수 있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일제는 경술 국치 5년 전인 1905년 11월17일에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을 강요해 조선의 외교권들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함으로써 사실상 식민지배를 시작했으며, 그 몇달 전인 7월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은 일본의 조선지배를 보장했고 영국은 8월12일 제2차 영-일동맹 체결로 같은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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