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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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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전통의 시사프로의 피디가 정장아닌 핑크 민소매 원피스 입고 나타났다 “세상이 변했잖아요” 진행자 김어준과 엄숙 엄살떨지 않는 재미 유쾌 의미심장 프로 만들기 고민
최보은의 인터뷰 무제한/ 정혜윤 CBS ‘시사자키’ 피디 <시비에스(CBS) 라디오>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월~토 저녁 7시~9시. 98.1MHz. 이하 ‘시사자키’)은 양심적이고 용기 있는 시사프로그램의 대명사요, CBS 피디(PD)들의 자부심의 원천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 음악방송을 내보내라는 당국의 지시를 거스르고 PD들이 주조정실 문앞에서 스크럼을 짠 채로 방송을 내보냈던 일은, 이 방송국에 입사하는 사원들이 제일 먼저 전해듣는 신화가 되었다. 정범구, 정태인 등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일이 직간접적 계기가 되어 정계로 진출한 지식인들도 여럿이다. 지금도 정치인이라면 보통 배짱이 아니고는 인터뷰 섭외를 거절하기 힘든 유력 프로그램중의 하나이고. 그런데 어머나 세상에, 9월5일부터 시행되는 가을 개편에서 이 CBS 간판 프로그램의 메인 프로듀서(공동연출 박철·이진성)가 젊은 여성 PD로 바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젊은 여성이란다! 이보다 더 귀가 번쩍 뜨이는, 상큼한 소식이 있을리야. 그러잖아도 학식과 교양으로 무장한 모범적 지식인의 전형이던 기존의 진행자들과는 180도 다른, ‘건들건들 스타일’로 세상의 위선적 엄숙주의에 항변하는 코스모폴리탄 아웃사이더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가 지난 3월부터 진행을 맡은 뒤 ‘시사자키’는 조금씩 변화를 겪어왔다. 그러니 앞으로 이 프로그램에 무슨 경천동지할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궁금해서 당장 정혜윤(34) PD를 만나야만 했다. 여기서 인터뷰 장소에 나타난 그의 옷차림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핑크 중에서도 가장 원색적인 핑크빛 민소매 원피스에 형광기 섞인 밝은 코발트블루색 가방까지! 바캉스용품 상품소개 책자에 등장할 모델 차림, 딱 그거였다. 옆 테이블에 앉아 촬영장면을 지켜보던 회사원들이 “혹시 <웰컴 투 동막골>에 나온 그 배우 아니에요?” 물었다. 이건 중요한 대목인데, 왜냐하면 정혜윤 PD가 쥐색 투피스 정장차림의 성공과시형 커리어우먼이거나 소매 걷어부친 남방에 청바지 차림으로 “난 일로 나 자신을 입증하고야 말겠어!” 외치는 선머슴과와는 거리가 먼 감성의 소유자라는 정보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를 ‘시사자키’ 담당으로 발령낸 회사의 의도와 이 옷차림 사이에 무슨 함수가 있지 싶었다. 이제 ‘시사자키’가 진지 무드에서 벗어나, 명랑쾌활 엽기발랄해지는 건가? 했더니, 그건 아니고 진행자 김어준씨 스타일에 맞는 프로듀서를 찾다보니 자신이 간택된 거 아닐까? 되묻는다. 그러니까, 바뀔 ‘시사자키’의 핵심 키워드는 정혜윤과 김어준 두 가지, 아니 그 둘이 합쳐져 일으킬 시너지인 셈이다. “김어준 발음은 꽝인데 시각 독특”“김어준 씨요? 진행자로서는 꽝이죠. 발음이 좋기를 해요, 어투가 점잖기를 해요. 그런데 있잖아요, 김어준씨한테는 이 현안에 대해 이쯤해서 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알고 싶다, 기대하게 만드는 게 있어요. 보통 사람은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는 각도에서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에 접근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죠.” 말은 농담처럼 하지만, 그는 요즘 김어준 스타일, 다시 말해 달라진 시대의 스타일에 맞는 시사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하여 목숨건 사람처럼 살고 있다. “기존의 ‘시사자키’는 가장 진보적 프로그램이라는 프라이드와 함께, 의제를 설정해야 한다는 목표의식이 강했어요. 중요한 문제다 싶으면 청취율도 상관하지 않을 정도의 자부심이 있었죠. 이주노동자 문제. 환경문제도 이 프로그램에서 처음 제기했다고 해요. 철거민이나 여성문제 같은 의제에 대해 지겹다 싶을 정도로 집요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했구요. 그런데 지금 시대가 바뀌어서 그것만 가지고는 어려운 상황에 봉착한 거죠. ‘시사자키’ 처음 생길 때는 본격 시사프로그램으로는 유일한 존재였어요. 다른 데선 뉴스의 한 코너에서 다룰 정도였는데, 두시간을 할애하고 나섰으니까요. 진보적인 칼럼니스트 있다 하면 무조건 불러냈죠. 그런데 지금은 누구나 할말 다하고 사니까 대체 누가 젊은 진보적 지식인이냐, 이런 상황이 된 거죠.” 그와 김어준은 지난 3월, 1년의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폐지된 문화프로그램 <저공비행>에서 이미 합을 맞춰본 적이 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지만, 이 프로그램은 ‘문화가 별 거냐? 우리 기죽지 말자!’를 표방하며 ‘낮은 시각에서 바라본 문화’를 수다떨 듯 다루어 적지 않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문화는 수준이 아니라 취향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와중에 생겨난 이 화제들은 다시 말해서, 대형 방송사고를 의미했다. 김어준 스타일이 워낙 솔직편안하다보니, 인터뷰 당하는 인사들도 덩달이 솔직편안해져버렸던 것이다.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문화적 취향을 묻는 ‘타인의 취향’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포르노를 즐겨 보십니까? 미성년들의 유해사이트 접속을 금지하는 법안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송승헌은 군대에 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통해 양복 벗은 의원들의 진솔한 취향을 알아본다는 의도였다. 유인태 의원에게 김어준이 질문을 던졌다. “평소에 언론을 싫어하신다고 알고 있는데요?” 답변은 핵폭탄이었다. “조선일보 X(남성 성기)같은 신문, 동아일보 X(뒷간가서 해결하는 일중에서 큰 것)같은 신문…” 기자들이 집단 취재차 버스를 탈 일이 있었는데 ‘왜 사람이 안타고 짐승들이 탔어?’라는 요지의 농담을 했다는 말까지. 인터넷과 오프라인이 패키지로 뒤집어지고, 당근, 엄청 쎈 경고를 먹었다. 결정적인 폐지 이유는 아마도 ‘힐링 소사이어티’라는 코너 때문이었을 것이다. 밥 먹을 때, 흔히들 정치인 얘기 많이 하는데, 그런 욕구를 반영해서, 특정 정치인 발언의 성향과 심리적 배경을 분석하고 그 해결책을 유머러스하게 제시하는 코너였다. 그런데 박근혜 대표 얘기가 딱 걸렸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일으킨 나라인데 생각하면, 나라 걱정 때문에 잠을 못잔다는 박 대표의 말을 근거로, 그의 부성 콤플렉스를 짚은 것까지는 좋았다. 모성성 강한 정치인, 우아하고 가장 여성성 강한 정치인이라고 분석한 것까지도 괜찮았다. 밧뜨, 힐링 대책을 제시하는 순서에서 (그렇게 나라 걱정되면) “농촌총각에게 시집가라”로 유머한 것이 화근이었다. 사방에서 또다시 난리가 났다. 김어준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는 수준의 농담은 방송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생각에 대한 화답은 연이어 날아드는 경고장이었다. 결국, 우리사회가 공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유머를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채, 경고가 누적된 이 프로그램은 폐지되고 만다. 쩝! 관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 다시 ‘시사자키’로 돌아와서, 시민사회 단체에서 주는 상이란 상은 1백% 수상한 이 모범생은, ‘개혁적 불량’을 권하는 시대의 변화에 어떻게 발을 맞출 것인가 하는 문제. 인터뷰 자리에 찬조출연한 김어준의 말은 이렇다. “지금까지 시사 프로그램은 주로 80년대 정서를 기반으로 과거를 팔아먹고 살아왔어요. 사회가 80년대에 지고 있던 부채도 거의 다 상환된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정치는 수백만가지 취향중의 한가지 취향일 뿐이잖아. 그래서 시사 프로그램에 더 이상 새로운 청취자층이 형성되지 않고 있고. 이 프로그램 듣지 않으면 나만 뒤쳐지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도 더 이상 없고. 따라서 시사 프로그램 제작진은 관성을 벗어나 사고가 자유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는 거죠. 우선순위를 재배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세상만사 우선순위는 끊임없이 변하는데, 사람들은 옛날에 한번 세팅한 우선순위를 바꿀 줄 모르고 있어요.” 정혜윤 PD(김어준은 ‘이 아이’라고 표현했음)의 머릿 속에는 그런 우선순위가 형성돼 있지 않기 때문에 사안에 본능적으로 반응해서 중요한 것을 캐치할 수 있을 거라는 게 김어준의 근거 있는 ‘아부’다. 김 총수의 말을 조금만 더 빌리자. “이제까지 시사프로는 심각 일변도였어요. 지들끼리 책상에 앉아서 나라를 구해. 엄숙과 엄살은 통한다고 보는데, 엄살이지 엄살. 진지해도 심각하지 않고 진정성 있어도 심각하지 않을 수 있는데 진지나 진정은 엄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거지. 한겨레도 똑같지, 씨바. 다르게 자기연출하고 표현하는 방법 모르니까 권위에 실려가는 거죠. 시사가 별건가. 세상만사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인 걸. 지가 얼마나 심각하고 엄숙하냐가 아니라 잘 전달되냐 아니냐가 중요한 거 아니냐구요. 잘 전달되려면 코미디도 하고 기법은 수만가지인데 오로지 책상 앞에 앉아서 엄숙하고 심각한 것으로 진지와 진정성을 확인받으려 하고 보여주려고 하는 그런 것 말고, 안 그런 시사프로 만들어보려고 하는 것”이 지금 그와 정혜윤 PD가 골머리를 싸매고 풀고 있는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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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은/전문 인터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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