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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25 15:58 수정 : 2005.08.26 15:10

이건희 시대
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펴냄. 1만2000원

나라예산 뛰어넘은 매출, 수출의 21%…
애국주의 자극하는 ‘삼성 기적’의 총지휘자
경영학적 분석 대상 넘어
사회·심리학 연구 대상으로 던지는 화두
우리는 정말 이건희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우리는 정말 이건희를 알고 있는가?” 비평가 강준만은 <이건희 시대>에서 자문하고 자답한다. “‘이건희 모델’이 모든 기업인들은 물론 국가 차원의 이상적 표준이 되고 있는 마당에 그 모델의 정체를 따져보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건희를 중요한 사회적 화두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치판단을 내리기 전에 이건희의 실제 권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걸 양지로 드러내놓고 사회적 화두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들리고, “삼성 덕에 먹고 산다”는 농담(?)이 쉽게 터져나오는 세상에 그 그룹 총수, 그것도 ‘천재경영’에 ‘황제경영’ 따위의 요란한 수식어가 따라붙는 ‘한국 제일’의 막강 파워 인물을 알아보자는데야. 더욱이 세상을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는 ‘도청 X파일 사건’ 한복판에 삼성이 도사리고 있는 판에.

하지만 이건희가 ‘사회적 화두’가 된 지는 이미 오래된 것 아닌가. “마누라와 자식들만 빼곤 다 바꿔라” “한국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 등 나라 안팎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언론들을 장식했던 ‘이건희 어록’들만으로도 그랬다. 게다가 그가 거느리고 있는 삼성그룹이 어떤 존재인가?

지난 한해 동안 상시 고용자 17만여명의 삼성 63개 계열사 전체매출은 135조5천억원, 경상이익 19조원(세전), 수출(해외 현지생산 수출분 제외)은 527억달러였다. 매출액은 같은 해 한국정부 연간 예산액 120조1393억원을 크게 뛰어넘었고, 수출액은 한국 전체 수출액 2531억달러의 20.8%에 달했다. 삼성전자만으로도 매출 57조6323억원, 순이익 10조7867억원(103억달러). 삼성전자는 이로써 국내기업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순이익 ‘100억달러 클럽’에 합류했다. 2003년도 기준 세후 순이익 100억달러 이상을 기록한 기업은 전세계적으로도 9개사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마쓰시타, 소니, 히타치 등 일본의 10대 전자업체 순이익을 다 합쳐도 삼성의 이익을 크게 밑돈다”며 위기감을 표출했다.

‘삼성공화국’이란 세평과 함께 이제 일개 기업 차원을 넘어 나라 전체의 진로에도 중대한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비대해진 삼성그룹의 총수 이건희. <한겨레> 자료사진
찬양하거나, 비판하거나

올해 7월 <포천>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에서 삼성전자는 매출 715억달러(약 74조원), 순익 94억달러(약 9조7000억원)로 전해 54위에서 19계단이나 뛰어오른 39위에 올랐다. 일본이 자랑하는 소니는 매출 666억달러에 순익 15억달러로 47위에 머물렀다.

한가지라도 삼성 제품 쓰지 않고 살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나라 경제가 삼성 눈치를 봐야 할 판인데다, 대내외적으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자긍심을 건드리고 애국주의까지 슬슬 자극하는 ‘삼성의 기적’을 연출한 총지휘자가 화두가 되는 건 당연하다. 대통령마저 권력이 시장으로 이동했다고 얘기하는 지금은 확실히 ‘이건희 시대’라 할만하다. 문제는 그러면 우리가 ‘정말 제대로 이건희를 알고 있느냐’일 터이다. 강준만은 계속한다. “재벌 총수들을 비평의 사각지대로 남겨놓고 유력언론이 그들에 대한 홍보성 기사만 양산해내고, 또 다른 쪽에선 극단적인 비판만이 존재하는 지금과 같은 풍토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경영·경제학자들이 직무유기를 범하고 있다면 다른 분야의 사회과학도들이라도 그런 작업에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아니 아예 한걸음 더 나아가 말하자면, 이건희를 기존의 경영학적 분석의 대상으로만 머무르게 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는 사회학적·심리학적 분석의 대상이 될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중간적 입장에 여지를 주지 않는 ‘제로섬 게임’식의 이 ‘양극단’에 대한 저자의 혐오는 도처에서 감지된다. 예컨대 그는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전투적 노동통제’라고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부도덕하게 비정규직 문제를 자기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등 강경일변도의 이익집단 수준으로 전락한 한국사회의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도 신랄하게 깐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 박승옥의 말을 빌어 그는 주장한다.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는 노동운동을 거꾸로 군사화시켜 노동조합을 전투부대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보루 역할에서도 빠르게 밀려나게 만들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전투’는 노동운동을 일반 국민들뿐만 아니라 노동자들 자신에게도 납득할 수 없는 정당성의 혼란에 지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을 민주주의와 평화세력이 아닌 무책임한 싸움꾼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의 위력을 과시하는 상습적 저항집단으로 인식되게 했을 뿐이다.” 저자가 막강한 자금력과 홍보·법률지원팀 등을 동원해 ‘코쿤’식 폐쇄적 경영이 불러일으키는 문제들을 ‘관리’하려는 삼성의 ‘레드 오션’ 전략을 비판하면서도 그 책임을 “삼성과 이건희에게만 물을 수 없다”며 내부비판을 막는 한국사회의 ‘전시체제’ 구조에도 책임을 지우는 한편, 관리가 아닌 ‘소통’을 통한 ‘블루 오션’ 전략을 역설하는 실용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자유주의 비판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를 취한다.

강준만은 ‘나는 유치원 때부터 혼자였다’는 이건희의 근접하기 어려운 성장비사, 그리고 그가 질과 디자인, ‘암묵지’를 강조하는 선구적이며 천재적인 ‘포스트모던 경영자’로 우뚝서는 설화의 진실과 허구, 삼성의 무노조 경영 및 ‘이재용 상속문제’·코쿤화·카리스마 경영의 허실을 특유의 방대한 자료동원력을 과시하며 헤집는다.

이건희학이 곧 ‘한국학’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적절히 배치한 숱한 자료들이 말하게 한다. 문제점을 짚고 자신의 관점을 드러낼 경우에도 절대 핏대를 세우진 않는다.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방략이겠지만, 자신도 그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양극단론에 대한 혐오 때문이리라.

저자는 이 책의 메시지는 “‘이건희학’과 ‘삼성학’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 모두 조금씩은 감염돼 있고 실천하고 있는 (삼성식의) ‘기만·분열·모순’의 게임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아보자는 것”이라며 “그런 점에선 이건희학과 삼성학은 곧 ‘한국학’”이라고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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