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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일/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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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일의 찬찬히 읽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존 르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 열린책들 펴냄, 2005 주위의 막연한 짐작과는 다르게 나는 장르문학을 썩 안 즐긴다. 추리소설·에스에프·판타지가 그려내는 작품 세계의 현실적 거리감과 문학성에 대한 회의 때문인 듯 싶은데, 자연히 나의 장르문학 독서목록은 밑천이 적다. 10년 전, 당시 잘 나가던 소설가가 극찬한 존 그리샴의 <펠리컨 브리프>는 잘 짜 맞춘 조립품 같았고, 작년 초 제목에 혹하여 읽은 필립 커의 <철학적 탐구>는 어느 순간 긴장이 풀리더니만 흐지부지 결말이 났다. 존 르카레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작가의 이름값에 끌렸다. 작가의 간판 작품인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제쳐 두고 이 소설을 고른 이유는 상대적으로 낮은 지명도와 열린책들이 펴내는 ‘존 르카레 전집’의 첫 권으로 선을 보여서다. 르카레의 대표작은 리처드 버튼이 출연한 영화로 살짝 맛을 본 때문이기도 하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이중간첩을 소재로 한다. 첩보 업계에서 ‘두더지’로 통하는 이중간첩의 실상을 파헤치기보다는 영국 정보부(일명 ‘서커스’)에 침투해 고위직에 오른 첩자를 색출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쫓겨난 전직 정보원 조지 스마일리가 이중간첩을 가려내는 비밀 작전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소설의 배경을 이루는 정보기관과 스파이 세계의 이모저모가 실감나게 그려진다. 공공 장소에서의 행동 수칙과 낯선 곳에서의 안전 조치는 광복절 낮에 시청한 영화 <본 아이덴티티>의 몇 장면과 맞물려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다. 다만, 아주 복잡한 기계에 걸어야 재생이 가능한 특별 테이프 같은 특수 장비는 만화에나 등장할 법하다. 이 소설에는 빤히 드러난 복선이 여러 개 있다. ‘서커스’의 옛 행동대원 짐 프리도가 교회에 숨겨둔 권총과 스마일리가 아내에게 선물 받은 라이터가 사건의 전개를 가늠하게 하는 실마리라면, ‘서커스’ 요원 피터 길럼의 애인 카밀라가 그녀의 정부에게 던지는 질문은 소설의 주제를 암시한다. “인생의 진실이란 무엇이냐.” 무리한 반전을 꾀하지 않은 점도 미덕이다. 그러면서도 독자 스스로 생각할 여지가 풍부한 문학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다. 이로 말미암아 이 작품은 장르적 속성을 뛰어넘어 본격문학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이 책의 매력은 무엇보다 우리 현실과의 기막힌 적합성이다. 오늘 우리가 확인하는 한국 정보기관의 추악한 실상은 30년 전 영국의 그것을 빼 닮았다. “우리 정보부에서 전문 기술과 보안 유지라는 평범한 상식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어.”라든가 정보기관의 존폐에 관한 르카레의 육성이 그러하다. “그 당시 영국과 미국의 정보부는 차라리 해체해 버렸더라면 도덕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국가에 덜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 스마일리가 상급자인 올리버 레이콘에게 ‘서커스’의 청소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가 퇴짜를 맞은 1년 전 상황을 돌이켜 보면서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 역시 남의 일만은 아니다. “실장님은 그게 위법이라고 말씀하셨지요.” “내가 그렇게 말했었나? 나도 참 대단히 거만을 떨었네!” 한편, “정보부야말로 한 국가의 정치적 건강도를 보여 주는 척도”라는 ‘서커스’의 2인자 빌 헤이든의 주장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첩보 업계 종사자의 자기 방어 논리에 불과하다. 한국이나 영국이나 정보기관의 본질은 같다. ‘중정’ ‘안기부’ ‘국정원’ 따위로 이름을 바꿔 부른다고 그 본성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사회에 해를 끼치는 정보기관은 없는 게 낫다. 하지만 이런 것일수록 한번 생겨나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건 아예 만들지 않는 게 상책이다.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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