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25 18:19
수정 : 2005.08.26 14:48
|
‘후끈’하지 않았던…나의 혼탕 출입기
|
한국사회의 성 관련 담론은 모두 성기로 함몰된다
성기는 정말 대단한 핵무기다 이원자탄의 격발장치는
‘알몸=성기노출’로 등식화하는 포르노그래피적 시선이다
세설
10년 전에 베를린 영화제에 취재차 간 적이 있다. 영화제 취재는 낮에 영화보고 저녁에 행사 쫓아다니다 마지막에 이런 저런 술자리로 마감하는 것이 보통이다. 나는 그 ‘보통’보다 조금 더 마셨다. 아침이면 늘 숙취가 남아 있어서 숙소에 붙은 사우나로 달려갔는데, 혼탕이었다. 물론 혼탕인줄 알고 있었다. 처음이라 그런지 몹시 긴장됐다. 입구까지는 씩씩하게 걸어갔는데 카운트에 앉은 금발의 여성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공판장으로 나가는 죄수 심정이 됐다. 사우나 도크에 들어가자 더 난처한 일이 발생했다. 다른 사람들은 힐끔 쳐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원위치 했는데, 한 독일 할머니가 눈을 15도 각도로 내리깔고 집요한 해부학적 시선으로 응시했다. 나는 몸 둘 바를 몰라 갖고 들어간 영화제 팜플렛을 읽는 자세로 10분을 버티다 나왔다. 안경 끼고 들어간 게 마음에 걸렸다. 둘째 날은 오기로 갔다. 다행히 할머니가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열흘간의 ‘나의 혼탕 출입기’ 마지막 날은 카운트의 여성에게 인사도 건네고, 태연자약하게 한 시간 이상 온탕 냉탕하다 나오는 걸로 완결됐다. 참 이상했다. 수십년간 쌓아온 알몸에 대한 금기 의식이 그렇게 쉽게 허물어져 버리다니!
열흘이란 짧은 시간 동안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강고했던 금기의 갑옷을 벗게 만들었을까? 아마도 그건 거기 있었던 사람들이 이성의 알몸을 대하는 스스럼없는 태도였고, 나는 거기에 계몽당했던 것 같다. 그 장소에서 알몸은 ‘옷을 입지 않은 상태’를 의미했다. 하지만 내게 알몸은 ‘성기가 노출된 상태’를 의미했다. 그 차이는 이런 것이다. 전자의 시선은 알몸을 ‘풀 샷’으로 보고 있다. 성기는 알몸에 붙어 있는 ‘다소 불편한’ 조그만 장기일 뿐이다. 미성년처럼 약간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이지만 흉악범이나 반체제 사범처럼 보호감호를 통해 격리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이 시선은 성기를 성기 이전에 배설기이자 생식기로 본다. 그러니 팬티는 배설기에 대한 위생학적 조치이고, 생식기에 대한 보호 장치이다. 말하자면 기능성 복장이다. 하지만 후자의 시선은 성기를 클로즈업해서 본다. 알몸은 성기를 도드라지게 부각시키는 배경일 뿐이다. 후자의 시선이 성기를 클로즈업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성기를 격리의 대상으로 금기시한 관념을 절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기가 강하면 위반에 대한 욕망 또한 강해지게 마련이니까. 이 시선은 성기를 성기로 밖에 상상할 줄 모른다. 팬티는 성기의 격리를 위한 관습적 장치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태도, 즉 알몸을 스스럼없이 보는 것과 성기를 은밀하게 상상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음란할까? 나는 후자가 더 음란하다고 생각한다. 혼자 음란한 상상을 하는 것이 사회에 무슨 해악을 끼칠까 싶지만, 문제는 이 ‘은밀한 상상’이 자신의 음란함을 자신이 보고 있는 알몸으로 투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십수년 전 한국사회에 이런 일이 있었다. 세계의 명화를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고야의 누드화 ‘옷을 벗은 마야’가 소개됐는데 체모 부분에 ‘스프레이’(화면 처리)가 뿌려져 있었다. 그 당시의 통념에도 이 누드화는 화집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미 알려진 그림이었다. 그런데도 그림의 체모도 가려야 된다는 심의 담당자들의 강박, 그건 평소 ‘알몸=성기노출’로 등식화 하는 포르노그래피적 시선에 찌들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발상이다. 포르노그래피적인 시선은 성기에 대한 도착적 욕망과, 그럼으로써 얻게 되는 성기의 격리에 대한 강박 사이에 갇혀 있다. 이 시야에는 성을 관계맺음의 채널로 승화시키는 그 어떤 가능성도 포착되지 않는다. 성기에 대한 도착은 성기를 제외한 몸의 나머지 부분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그건 몸에 대한 폭력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화성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이 보여준 성기 절단과 훼손은 포르노그래피적 시선의 본질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포르노그래피적 시선의 근원적 문제는 음란함이 아니라 폭력성이다. 그런데도 시선 자체가 도착돼 있기 때문에 그걸 자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포르노그래피적 시선이 만연한 사회는 성에 대한 과민함과 폭력에 대한 무감각이 공존한다. 외국 영화제에 나가 서구 여기자들에게 자주 들은 말 중 하나가 “한국 영화는 왜 그렇게 강간 장면이 많냐?”는 거다. 그냥 정사 장면이 그들이 느끼기에는 강간 같은 게 많다는 거다. 우린 이걸 의식하지 못한다. 성기에 도착된 시선은 나머지 알몸의 태도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알몸 사진을 홈페이지에 올린 미술교사 부부에 대한 대법원의 유죄판결을 보고 참 씁쓸했다. 내가 본 부부의 누드는 외설스럽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오히려 남루하고 처연해서 그들 부부가 보고 있으면 서로에 대한 연민으로 연대가 깊어질 것 같았다. 타인이 봐도 적나라한 존재의 남루함을 통해 겸허함과 관계에
대한 절실함을 느끼는 게 정상일 것 같았다. 그럼에도 여기서 성적 모티브를 찾아내는 이 지독한 도착증! 카우치 사건 때도 그랬다. 공중파에서 성기라는 무기를 사용해서 폭력을 행사한 죄야 마땅히 문초해야 하겠지만, 언론의 문제설정은 성기 주변을 벗어나지 못했다. 카우치 사건 이후 연예인 사이에 ‘노출 금지령’이 내려졌다고 하는 소문도 들린다. 경찰이 홍대 앞 클럽을 단속한다는 기사도 나왔다. 이상하게도 한국 사회에서 성과 관련된 담론은 모두 성기로 함몰된다. 성기는 정말 대단한 핵무기다. 이 원자탄의 격발장치가 포르노그래피적 시선이라는 걸, 성기노출이 음란의 시작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걸, 그대는 아시는지?
남재일 문화평론가
광고
기사공유하기